티스토리 뷰
이 책을 한국에서 펴내는 기쁨
지금처럼 인류가 인류만을 위한 욕망의 길을 계속해서 달리게 된다면, 우리는 오래지 않아 낭떠러지에 서게 될 것이다.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생물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녹색의 별인 이 지구가 2백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인간의 손에 의해 엄청나게 파괴되어 왔다. 게다가 그 현상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따져볼 필요도 없이, 인간의 지식과 행위 일체가 모두 반反자연적이었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은 지구 자원과 환경을 거리낌 없이 마구 희생시켜가며 그 위에 구축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몸도 마음도 생활도 부자연스러워지고 불건강해졌다. 비뚤어진 허구의 문명 생활 속에서 인류는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이대로 간다면 인류는 지구 최후의 동물로서 멸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지구를 멸망시킨' 죄 많은 동물이라는 부끄러움을 남긴 채..
나는 온 생애를 바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농법, 자연농법의 세계를 찾아왔다. 그러나 그 길은 아득히 멀어서 아직은 완성에 이르렀다기보다 단지 그 실마리를 잡았을 뿐이다.
이 자연농법이 지혜 깊은 한국인의 손으로 완성된다면 그보다 큰 기쁨은 없다.
자연농법은 인지와 인위를 버리고 무위의 자연에 맡기는 농법이자, 신이 농사를 짓고 사람은 그 시중을 들뿐인 신의 농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의 작은 지식 위에서 이루어지는 과학농법에서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신의 지구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자연농법이다. 즉 신을 도와서 대지에 봉사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다.
자연농법은 지구가 황폐해져 가는 것을 막고, 지상을 다시 녹색으로 풍부한 낙토樂土, 곧 도원경桃源境으로 바꾸고 싶다는 커다란 꿈을 갖고 있다. 이 자연농법이 한국인에게 가장 알맞은 선인仙人 농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한국인에게 큰 신뢰와 기대를 걸고 있다.
1988년 12월
후쿠오카 마사노부
1장 1절(사람은 자연을 알 수 없다)이 책의 전체 분위기나 저자의 가치관을 압축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대로 옮겨 봅니다.
사람은 자연을 알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스스로 지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자부해왔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자연을 알고, 자연을 이용할 수 있으며, 그러 한 지식은 곧 힘이라고 과신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인간은 자연과학의 발달, 물질문명의 원심적 확대를 향하여 직진해왔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출발했으면서도 점차 자연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자연의 반역아로서 인간의 독자적인 문명을 쌓아왔다.
그러나 기대했던 거대한 도시의 발달이나 문화적, 경제적 활동의 팽창이 인간에게 가져온 것은 인간 소외의 덧없는 기쁨이고, 자연의 난개발에 따른 생활환경의 파괴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와 약탈 행위는, 결국 자원의 고갈과 식량 위기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인류의 미래에 불길한 그림자를 던지게 되었다. 그제야 겨우 문제의 중대성을 깨달은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대책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반성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류는 파멸로 향한 궤도를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있다.
자연으로부터 고립된 인간 생활은 공허하다. 생명과 혼의 원천이 모두 고갈되고, 오직 눈앞의 시간과 공간을 다툴 뿐인 기괴한 문명 속에서, 인간은 지치고 병들어가고 있을 뿐이다.
A. 자연에 손대지 말라
무엇보다 인간이 자연을 알고, 자연을 이용하여 인간의 문명을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다. 인간이 자연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자연 그 자체, 그 본질을 밝히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통일적인 생명체인 자연은, 인간의 지식으로 분해한다거나 해석한다거나 하는 분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 번 해체된 자연은 이미 본래의 자연 그 자체가 아니다. 인간의 '분별지分別知'로 구성된 자연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살아있는 자연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더구나 그 죽은 자연의 모습은 인간의 마음을 분열시키며 혼란을 더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인간은 과학적인 사고를 통해 자연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 자연의 창조에 무엇 하나 더할 수 없는 존재다.
'분별지'를 통해 보는 자연은 허상의 자연이다. 인간은 녹색 이파리 한 장, 한 줌의 흙조차 영원히 알 수 없다. 인간은 나무와 흙을 참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집적에 의한 인지, 곧 인간의 지식으로 해석한 나무와 흙을 알았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해도, 또 자연을 이용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 게다가 죽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자연의 본체와는 무관한 것, 허망한 것을 가지고 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인간은 조물주도 만물의 영장도 아닌데, 스스로 자연의 모든 것을 알고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교만한 종족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의 순리와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자연을 이용하고, 파괴하고, 복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불행은 이런 자신의 오만한 행위에 인간이 불안을 느끼거나 반성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지구는 동식물이나 미생물의 유기적 연쇄관계를 가진 공동체로서, 인간의 눈으로 보면 공존공영의 모습으로도, 약육강식의 세계로도 보인다. 그것들 사이에는 먹이사슬 관계도 있고, 물질 순환도 있다. 멈춤 없는 불생불멸의 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 세계, 곧 물질이나 생물계의 순환은 살아 있는 직관에 의해 감득感得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것을 분해하고 분별함으로써 자신의 인식 세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과학만능주의다.
가령 과학농법은, 사과나무나 온실 딸기에 아주 강한 농약을 뿌려서 꽃을 찾아오는 벌이나 나비 등을 전멸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꿀벌 대신에 인간이 꽃가루를 채집하여 일일이 꽃에 꽃가루를 칠해준다. 이 인공수분의 광경은 희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무수한 동식물이나 미생물의 역할을 인간이 대신 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분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활동을 막고 그것을 일일이 연구하여 그 대역을 하고자 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헛수고가 어디 있겠는가?
예를 들면, 과학자는 쥐의 생태를 연구하여 쥐를 죽이는 약을 개발한다거나 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왜 쥐가 대량으로 번식하기 시작했는지 그 근본 원인을 알지도 못하면서, 혹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그런 연구를 하는 것이다.
쥐의 번식이 자연의 균형이 깨진 데서 온 것인지, 자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죽이는 게 좋다고만 여기고 있다. 그곳, 그때의 요구에 맞춘 대책을 취하고 있을 뿐, 자연의 진짜 순환에 대한 책임 있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식물이 지상에서 맡고 있는 역할 모두를 과학적인 분석이나 인간의 지식으로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전체의 순환 과정을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죽이거나 키우는 것은 자연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가령 산에 나무를 심는 것조차도 넓은 안목으로 보자면 자연 파괴가 될지 모른다. 잡목이라며 베고, 그 자리에 인간에게 가치가 있다며 삼나무나 소나무를 많이 심고, 그것으로 녹색의 숲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근시안적인 판단이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수종이 바뀌면 산림 토양에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며, 온도나 공기의 질에도 영향을 주고, 그것이 미묘하게 기상을 바꾸고, 미생물계에도 많은 영향을 가져오는 듯 보인다.
자연의 움직임을 자세하게 보면 끝이 없다. 그것들은 서로 복잡하게 작용하며,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순환한다. 앞에서 말한 나무 심기를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잡목을 자르고 삼나무를 심는 일은 작은 새의 먹이 결핍 현상을 초래한다. 작은 새가 없어지면 하늘소가 번식한다. 하늘소는 소나무를 죽이는 선충을 매개한다. 선충이 이상 번식하는 것은 그들의 먹이가 되는 병균이 소나무 줄기에 기생했기 때문이다. 병이 든 것은 소나무가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쇠약해진 원인은 소나무 뿌리에 공생하는 송이버섯 곰팡이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로운 균이 사멸한 이유는 땅 속에 나쁜 균인 흑선균黑線菌이 만연됐기 때문이다. 나쁜 균들이 많아진 까닭은 흙이 산성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대기 오염이나 방사능에 의한 것이고, 그 원인은...?이 되면, 무엇이 원인이고, 진짜 원인인지... 알기 어렵다. 좌우간 소나무가 시들어 죽으면 조릿대가 늘어난다. 조릿대 열매가 풍부해지면 쥐가 번식한다. 쥐는 삼나무 묘목을 마구 먹어치우기 때문에 인간은 쥐를 죽이는 약을 살포한다. 쥐가 적어지면, 그것을 먹이로 삼는 족제비나 뱀이 줄어든다. 이번에는 족제비를 보호하기 위해 그들의 먹이가 되는 쥐 사육을 시작한다... 이렇게 끝이 없는데, 이것은 마치 미친 사람의 백일몽과 같은 짓이 아닌가?
지금 일본의 논에서는 1년에 여덟 번 이상 극약이 뿌려지고 있지만, 농약을 주지 않는 논과 병충해 수는 거의 같다. 그런데도 그 원인을 농업기술자들이 거의 연구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농약 살포로 벼멸구의 대군만 죽는 것이 아니다. 1평방미터에 몇천 마리, 몇만 마리나 되던 거미 새끼가 문자 그대로 거미 새끼처럼 떨어지며, 단 몇 마리가 남을 뿐 다 죽어 없어진다. 풀 속에서 무리지어 날던 개똥벌레의 큰 무리가 자취를 싹 감추기도 한다. 두 번째 농약 살포로 천적인 벌과 나비가 죽고, 잠자리의 유충이나 올챙이와 미꾸라지가 죽어서 썩어 문드러진 모습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것들을 보면 농약의 일제 산포散布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가 일목요연해진다.
자연을 지배하려 해도 인간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연의 활동에 봉사하는 일뿐이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B.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운동
'무엇인가를 하는 것으로써 물질문명의 확대를 꾀하던 시대는 종말을 맞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응결, 수렴의 시대가 오고 있다. 자연과의 융합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생활 과 정신문화의 확립을 서두르지 않으면, 인간은 한 없이 복잡하고 혼란한 생활 속에서 점점 쇠약해져 가게 된다.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 한 그루의 나무와 한 뿌리의 풀의 마음을 알려고 할 때, 인간은 머리로써 자연을 해독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무심, 무욕, 무위, 무책無策으로써 자연과 함께 살아가면 좋았다. 인간의 지식에 바탕을 둔 허망한 자연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무심 상태로 오직 참 자연, 즉 절대계로 복귀하는 길밖에 없다. 아니, 바랄 필요도 없다. 기도도 없이, 오직 무심히 대지를 일구기만 하면 좋았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인간,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되도록, 지금까지 인간이 해온 것을 되돌아보며 인간과 사회에 관련된 헛된 우상을 하나하나 없애 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운동이다.
자연농법도 이 운동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무제한으로 팽창, 확산되고 복잡해져 가며 헛수고를 요구하는 인간의 지식과 행위를 응결, 수렴하여 단순화, 생력화省力化, 곧 일손을 줄이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곧 자연의 철리를 따르는 길이다. 자연농법은 단순한 농업기술의 혁명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생활태도, 즉 세계관을 바꾸는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 정신운동의 현실적 토대를 이루는 것이 자연농법이라고 할 수 있다.
'것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은 자연과 대화할때 (0) | 2023.02.28 |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0) | 2023.02.13 |
라면을 끓이며 (0) | 2021.01.04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제로) (1) | 2021.01.01 |
노화와 질병 (0) | 2020.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