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그들은 오전 열 시쯤 12번 부두를 찾았고, 키 크고 빛바랜 피부의 퓌리 경비원에게서 출입 허가를 받았다. 샌데커는 낡고 구겨진 옷차림에 때 묻은 헐렁한 모자, 낚시 도구 상자와 낚싯대를 들고 있었다. 티디는 슬랙스에 매듭 지은 블라우스에 남자용 바람막이를 걸쳐 따뜻하게 입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팔 아래에 스케치 패드를 끼고, 다른 한쪽에는 작은 숄더백을 메고 있었으며 두 손은 바람막이 주머니에 깊이 찔러 넣어져 있었다. 경비원은 뒤에서 어정거리는 피트를 보고선 전형적인 더블테이크(눈을 더 크게 뜨며 놀라는 동작)를 했다.샌데커와 티디가 어부처럼 보이고 입었을지 몰라도, 피트는 마치 5월의 여왕처럼 눈에 띄었다. 그는 빨간색 스웨이드 슬립온 부츠에, 형형색색 줄무늬의 덕 팬츠를 입고 있었고, ..
제 8 장레이캬비크의 스노리 레스토랑을 통째로 들어 올려 세계의 어느 미식가들이 모인 도시 한복판에 내려놓는다면, 즉시 존경 어린 찬사를 받았을 것이다. 식당의 중심에는 바이킹 전통으로 설계된 커다란 홀 하나가 있었다. 개방형 주방과 불을 땐 흙 오븐이 식사 공간에서 몇 발짝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느긋하면서도 우아한 저녁 식사를 즐기기에 완벽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두툼한 나무 패널로 장식된 벽과 정교하게 조각된 문과 보들이 따스한 기품을 더했고,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한 뷔페 테이블에는 아이슬란드의 토속 요리만도 이백 가지가 넘게 차려져 있었다.피트는 북적거리는 홀을 둘러보았다. 테이블마다 아이슬란드인들과 그들의 매혹적인 동반자들이 웃음과 대화로 가득했다. 그는 그 광경을 눈으로 훑으며 진한 음식 냄새를..
제 7 장몇 번을 더였는지 정확한 횟수는 기억나지 않았다. 파도 아래바닥에서 몸부림치며 다시 일어난 피트는 헌뉴웰을 끌고 해변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그때마다 그는 해양학자의 팔을 붕대로 감아 응급조치를 하고는 다시 암흑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필사적이었다. 그 사건의 잔상은 영사기처럼 그의 뇌리를 되감아 반복되었고, 그는 의식의 찰나를 꼭 붙들어 두려 했지만 과거를 바꿀 수는 없었다. 악몽 같다고 희미하게 생각하면서도 피트는 피로 얼룩진 해변을 간신히 떠나려 애썼다. 힘을 모아 겨우 눈을 뜨니, 빈 침실을 기대했던 그의 시선 앞에는 침실이 있었지만 텅 비어 있지는 않았다.“좋은 아침이에요, 더크.”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일어날 줄 몰랐어요.”피트가 침대 맨발에 앉아 있는, 웃음 띤 ..
제 6 장농부와 맏아들은 헌뉴웰을 랜드로버로 옮겼다. 피트는 뒤칸에 올라 박사의 머리를 무릎에 베게 하고 탔다. 그는 탁하게 흐려진, 초점을 잃은 두 눈을 감기고 듬성듬성 남은 흰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었다.대부분의 아이들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했겠지만, 트럭 적재함에서 피트를 둘러싼 소년소녀들은 조용하고 침착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엔 감정이라곤 하나도 비치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언젠가 찾아오는 유일한 확실성을 그저 완전히 받아들이는 기색뿐이었다.튼튼하고 잘생긴, 바깥일로 다져진 사나이인 농부가 좁은 길을 천천히 올라 절벽 위 초원으로, 그리고 들판을 가로질러 운전했다. 랜드로버 꼬리판 뒤로 화산질의 붉은 먼지 구름이 작게 일었다. 몇 분 만에 그는 전통적인 아이슬란드 교회 묘지가 마을을 굽어보는, 하..
제 5 장아이슬란드—서릿발과 불꽃의 땅, 투박한 빙하와 속을 끓이는 화산의 섬. 용암층의 붉은빛, 구릉 툰드라의 초록, 잔잔한 호수의 푸른빛이 자정을 비추는 태양의 황금빛 아래 프리즘처럼 펼쳐져 있었다. 남쪽으론 난류인 걸프 스트림, 북쪽으론 차가운 극해에 접해 대서양에 둘러싸인 아이슬란드는, 까마귀가 직선으로 난다면 뉴욕과 모스크바의 정확히 중간에 놓여 있다. 이름이 암시하는 것만큼 차갑지 않은, 만화경 같은 풍경의 이상한 섬. 가장 추운 1월에도 평균 기온은 미국 뉴잉글랜드 해안과 큰 차이가 없다. 처음 보는 사람에겐, 아이슬란드는 분명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의 기현상처럼 보인다.피트는 지평선 위로 톱니처럼 솟은 만년설 봉우리들이 자라나고, 율리시스 아래 반짝이는 물빛이 심해의 진한 남청색에서 연안 ..
제 4 장피트는 움직이지도, 대꾸하지도 않은 채 그을린 갑판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십 년은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머릿속은 코스키의 출현을 설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언젠가는 지휘관이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최소한 세 시간은 지나야 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제 분명해졌다. 코스키는 정해진 합류 시간을 기다리기는커녕, 헌뉴웰이 짠 항로를 따라 카타와바를 전속력으로 얼음 지대 안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헬리콥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말이다.코스키는 손전등 빛을 사다리에 비추어, 그 옆에 선 도버의 얼굴을 드러냈다.“할 이야기가 많군. 피트 소령, 헌뉴웰 박사, 올라오시지.”피트는 재치 있는 대꾸가 떠올랐지만 곧 지워버렸다. 대신 거칠게 내뱉었다.“엿먹어, 코스키! 네가 내려와..
3 장긴장된 시간이 고요 속에서 흘러갔다. 피트는 중요하다고 할 만한 말을 꺼내기까지 그 몇 분을 견뎌야 했다.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조차,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희미한 속삭임처럼 들렸다. 왜 속삭이지? 그 스스로 의아해했다.헌뉴웰은 서른 피트쯤 떨어진 곳에서 얼음을 탐침봉으로 찔러보고 있었다. 러시아 잠수함은 이제 수면 위에 떠올라, 빙산 북쪽 가장자리에서 4분의 1마일 떨어진 곳에 정지해 있었다. 피트는 성당 같은 침묵 속에서 여전히 낮게 깔린 목소리로 간신히 헌뉴웰의 주의를 끌었다.“시간이 없어요, 박사님.” 큰소리를 내도 러시아 놈들이 알아들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어쩐지 들킬까 두려웠다.“나도 안다고!” 헌뉴웰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놈들이 여기 닿기까지 얼마나 남았나?”“고무보트..
2 장수많은 대양 가운데서 전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바다는 대서양뿐이다. 태평양, 인도양, 심지어 북극해까지 저마다 특유의 성질과 변덕을 지녔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다가올 기분을 어느 정도는 암시해 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대서양은 다르다. 특히 북위 15도 위쪽은 더하다. 몇 시간 사이에 거울처럼 잔잔하던 바다가 순식간에 포말을 뒤집어쓰는 마(魔)의 가마솥으로 변하고, 등급 12의 허리케인이 그 변화를 부추길 수 있다. 반대로 대서양의 변덕이 거꾸로 작동할 때도 있다. 밤새 강풍과 높은 파도가 몰아치며 폭풍이 다가옴을 예고하더니, 새벽이 밝자 텅 빈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옥빛 바다뿐일 때도 있는 것이다. 그날 새 해가 떠오를 무렵, 카타우아바호의 승조원들이 평온한 바다를 가르며 느긋하게 항해를 즐..
1 장소령 지휘관 리 코스키는 옥수수 속대 파이프를 더 깊이 물고, 매듭 같은 주먹을 모피 안감이 달린 방풍 외투 속으로 두 치 더 움켜쥐었다. 그리고 매서운 추위에 몸을 떨었다. 마흔한 살을 두 달 넘긴 나이, 그중 열여덟 해를 미 해안경비대에서 보낸 그는 키가 작았다. 아주 작았다. 두껍고 겹겹이 껴입은 옷은 그를 키만큼이나 넓어 보이게 만들었다. 황갈빛 머리칼 아래 푸른 눈은 언제나 강렬하게 빛났는데, 기분과는 상관없이 그 빛이 사라지는 법은 없었다. 그는 완벽주의자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지녔는데, 이는 해안경비대 최신예 초대형 커터선 카타우아바호의 지휘관으로서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자질이었다. 그는 전투닭처럼 다리를 벌리고 함교에 서 있었고, 옆에 서 있는 산처럼 거대한 사내를 향해 몸을 돌릴 ..
프롤로그약물로 인한 잠은 허무 속으로 흩어지고, 소녀는 고통스러운 몸부림 끝에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흐릿한 빛이 천천히 열리는 눈을 맞이했고, 역겨운 악취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알몸이었으며, 맨등은 눅눅하게 젖은 누런 점액으로 덮인 벽에 붙어 있었다. 현실일 리 없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막 깨어나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이건 분명히 끔찍한 악몽일 것이다. 그러나 안에서부터 솟구치는 공포를 다잡기도 전에, 바닥을 뒤덮고 있던 누런 점액이 꿈틀거리며 살아오르더니 그녀의 무방비한 허벅지를 타고 기어올랐다.이성이 마비될 만큼의 공포에 휘말린 그녀는 광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미친 듯이 발악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손목과 발목은 단단한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그마저도 끈적이는 점액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