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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0•26 거사,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는가?
10•26 사건 45주년, 상처 치유도 사회적 논란도 미결과제로 남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왜 대통령 박정희를 권총으로 쏘았는가?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10•26 사건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 책은 그런 물음에 대한 가장 실증적이고 분명한 답변을 담고 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박정희를 권총으로 살해한 10•26 사건이 올해로 45주년을 맞았다. 유신 군사독재의 '오너'가 제거된 지 역사적으로 한 세대가 바뀌고도 다시 15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김재규가 쏜 두 발의 총탄은 강고하던 유신을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후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살상 진압 등 역사적 복고 역풍이 있었으나 6월 항쟁과 개헌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대한민국은 고도의 산업국 가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장기 독재의 상처가 아직 다 치유되지 못한 채 피해자 개인들의 고통과 회한이 이어지고 있다. 사회적 논란 또한 청산되지 않은 미결과제로 남아있는 실정이다.
10•26의 주역인 김재규의 명예 회복을 위한 재심 청구 재판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2020년 유족이 제출한 재심신청은 2024년 들어서 구체적인 심리를 몇 차례 마친 채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1994년 출간했던 이 책을 30년 만에 재출간하는 이유들이다.
김재규의 유족들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죄목 '내란 목적 살인'이 "사실과 법리에 위반되며 사법살인과 다름없다"고 재심 청구 이유를 밝혔다. 전두환 신군부가 조종한 군사법정에서 내란 목적 살인이라고 판결했으니 재심은 당연한 일이다.
신군부는 10•26 사건 후 12•12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탈취한 정치 군벌 하나회와 군 내부의 그 후원자들이다. 5•18 광주 민주항쟁에 대한 살상 진압을 주도한 내란집단이 이들 하나회였다. 당시 진압작전의 실질적 지휘부와 현장 지휘관들이 하나회 멤버들이었다. 그 핵심 수뇌들은 보안사령관 전두환, 수경사령관 노태우, 특전사령관 정호용이었다.
김재규는 군사재판 진술에서 "민주헌정을 조속히 복원하지 않고 이대로 가면 내년 4~5월경에는 큰 국민 저항에 부딪칠 것" 이라고 예언했다. 이는 5•18 광주민주항쟁으로 적중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 진술에서 10•26에 대해 일관되게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혁명'이라고 말하다 군검찰관의 제지를 받았다. 그 혁명이 시민 대중의 힘으로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로 회귀하려는 역풍은 더욱 거세게 불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혁명을 했는데 잘못하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그의 우려대로 10•26 사건은 국민을 지켜야 할 국군이 시민들을 학살한 5•18 광주민주항쟁 살상 진압 내란으로 이어진다. 5•18은 10•26의 복고 역풍이었다.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민주항쟁을 소재로 쓰인 소설이다. 광주항쟁 이듬해 어른들이 부엌에 모여 앉아 밤 아홉 시 뉴스를 보고 있던 틈에 열두 살 소녀 한강은 어른들 몰래 《광주민주항쟁 사료전집》을 펼쳤다. 그는 자료집의 충격을 이렇게 썼다.
"총검으로 길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전쟁 속의 적지에서조차 넘어서는 안 될 인륜적 레드라인이라 할 여성 성폭행도 진압군에 의해 여러 건 자행된 것으로 드러났다. 동족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만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신독재 종식과 민주헌정 회복이라는 10•26 거사의 목표, 국민의 염원과 정반대로 역사는 뒷걸음질을 쳤다. 인간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탄으로 절명했으나 유신 2기에 해당하는 군부 독재체제가 멸망하는 데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군부독재체제의 장기집권 음모는 6월 항쟁의 성과인 대통령 직선제에 이어 1991년 대통령 김영삼이 하나회 군인들을 숙청하면서 1차로 마무리되었다.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는가?
세계 역사상 희귀한 사건인 10•26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과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10•26의 주역인 김재규의 군사재판 진술을 총정리해서 정제해낸 박정희 살해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유신독재에 대한 미국의 비판과 그것에 반발해 반미 노선을 감행하려는 박정희를 보며 김재규는 국가적 위기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미국은 유신체제를 고쳐 민주헌정으로 복원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압박했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대외정책에서 강력한 인권 보호를 내걸었다. 김재규는 카터 미국 행정부의 요구를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미국놈들 갈테면 가라고 해"라고 내뱉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 진술에서 "그렇게 되면 한국은 태평양상의 일엽편주에 불과하며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한다"고 토로했다.
당시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치 환경은 북한과의 대화도 미미한 데다 코앞의 공산 강국들인 중국 및 소련과 외교 관계조차 수립하지 못한 상태로 지금과는 완연히 달랐다. 공산권 강대국 들과 맞대결하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한 반도는 곧바로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공산권의 입김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김재규는 그것을 6•25 전쟁이 재발하는 상황이라고 보았다.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에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이라는 두 개의 국가안보 책임 자리에 임명된 유일한 실력자로 국가안보 지상주의자였다. 그는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미국의 견제, 이어지는 박정희의 반미 행보로 인해 국가 안보가 위기를 맞았다고 판단했으며 이를 방관할 수 없었다.
둘째, 1979년 10월 중순 폭발한 부산•마산시민항쟁이 단순한 재야 민주화 운동권이나 대학생 단체의 행동을 넘어서 전국적으로 독재 반대의 민심이 발화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10•26 당일 술자리에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마시민항쟁과 같은 국민 저항에 대해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학살했는데 우리도 100~200만쯤 탱크로 밀어버리면 된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박정희는 "서울에서 사태가 발생하면 발포 명령을 내가 직접 내리겠다. 대통령인 내가 직접 명령하는데 누가 막겠느냐"고 했다. 김재규는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이대로 가면 조만간 숱한 국민이 희생당할 것이 불을 보듯 빤하다고 보았다. 그는 군사법정 진술에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사람의 목숨은 똑같은 것이다. 다수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나에게 상관이고 은인인 각하 한 사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부마항쟁의 배경은 그 지역 출신인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한 유신독재의 공작정치가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김영삼과 함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 견제 세력의 양대 기둥인 김대중은 1973년 이후락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도쿄에서 납치돼 온 후 가택연금 상태로 정치 활동이 막혀있었다.
부마항쟁은 직접적인 원인인 야당 탄압 외에도 사회경제적 모순과 동남권 제조업 경제의 불황이 지역 민심을 더욱 악화시킨 것이 배경으로 분석된다.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정권은 수출 중심의 경공업 육성정책을 폈고, 이에 따라 1960년대 부산과 마산에 신발•합판 의류 공장들이 집중적으로 건설됐다. 그러나 유신 선포 후 박정희는 군사력 강화 목적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경제정책 방향을 중공업•건설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정부 투자가 포항·울산·광양 등지의 중화학·철강·조선 쪽으로 바뀌었다.
더구나 1970년대 하반기 한국 경제는 전 세계적인 불황과 석윳값 급등으로 인해 소비재 상품의 수출이 크게 둔화됐다. 이 때문에 경공업 소비재 생산 중심의 부산·마산 지역경제가 불황에 빠졌으며 정부에 대한 반감이 폭발 지경까지 갔다고 할 수 있다. 중정부장 김재규는 부마항쟁의 현장에 내려가 시찰하는 도중 일반 시민들이 시위대에 음료수 등을 날라다 주는 광경을 보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민심의 이반을 실감했다고 군사법정 진술에서 밝혔다.
당시 부마항쟁의 현장에 파견된 특전사 예하 공수부대는 그로부터 7개월 뒤 광주항쟁에 투입되는 동일한 진압군인 1•3•5 공수여단이었으며 여단장도 동일 인물이었다. 부마에서 진압군은 전차를 세워놓고 무력 과시 위주로 시위대를 압박했으며 가혹한 폭행을 하지 않았고 더구나 발포는 없었다. 김재규는 군사 재판에서 부마항쟁 중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공수부대가 광주에서는 참나무 몽둥이로 시민•학생 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으며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시민군과 자치공동체를 조직하자 아예 발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최고권력자가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바뀌었으며 지역이 부산·마산과 광주라는 차이일 뿐이지만 가해 행위와 피해 상황은 큰 차이를 보였다.
10•26 사건의 셋째 원인은 대통령 박정희의 사생활 문제였다. 소행사 대행사로 불리는 '술과 여자'를 즐기는 박정희의 부도덕한 사생활에 대한 김재규의 인간적 환멸감이었다. 박정희는 궁정동에 사실상 비밀 요정인 안가를 두고 여기서 사흘에 한 번꼴로 외부에서 여자를 불러들여 술자리를 가졌다. 국가 위기관리의 핵심기관인 중앙정보부의 기밀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안전가옥(안가)에서 최고권력자가 측근들을 불러놓고 빈번하게 주색 유희에 빠져든 것이다.
동석하는 여자는 항상 두 명으로 가수나 영화배우 등 기성 연예인과 나이 어린 연예인 지망생이었다. 혼자서 여자와 술 마실 때는 소행사라 했으며 청와대 비서실장·경호실장·중앙정보부장 등 핵심 측근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는 대행사라고 했다. 10•26 당일도 유명 가수와 연예계 지망 여대생이 동석한 대행사였다. 박정희는 술이 취하면 양옆에 앉은 여자 중 어느 한쪽으로 몸이 기울었고 그 뒷일은 본인들과 중앙정보부의 안가 담당자만 아는 비밀이었다. 박정희의 비밀 요정 궁정동 안가와 소행사·대행사를 관리하는 직책이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으로 대통령의 채홍사라 불리기도 했다.
절대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아무도 견제할 수 없었던 1인 독재 유신체제의 절대권력자는 그렇게 주색에 빠져들었다. 궁정동 안가의 소행사·대행사는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유탄에 맞아 숨진 이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박정희는 그 이전인 1973년부터 술과 여자에 빠져들기 시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박정희의 여성 편력으로 부부 싸움이 잦았던 것은 별로 비밀도 아니었으며 육영수 여사의 얼굴에 멍 자국이 외부에 노출되기도 했다. 마음은 권력에 취하고 몸은 술과 여자에 취한 유신 이후의 박정희는 판단력 마비로 인한 국가 위기감을 불러왔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주색에 빠져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은 것으로 우려했다.
김재규의 뒤통수 확인사살은 인간적 환멸감의 발로
궁정동 안가의 소행사·대행사를 관장하며 그의 주색 행각을 지근거리에서 보아온 사람이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와 안가 관리인 남효주 사무관이었다. 10·26 사건 당일도 이들은 안가 정원에서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너무 한다"는 얘기를 주고 받았다. 이들이 궁정동 안가를 관리한 내역과 특히 박정희의 주색에 대한 뒷바라지는 중정부장 김재규에게 바로 보고됐다. 김재규가 박정희의 판단력을 우려하게 된 것도 그가 술과 여자를 과도하게 탐닉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0•26 사건 당일 김재규는 옆에 앉은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을 팔꿈치로 툭 치면서 "각하 좀 똑바로 모시시오"라고 말한 뒤 권총을 빼들었다. 첫발을 차지철에게 "이 버러지 같은 친구!" 라고 소리치면서 총탄을 발사했다. 이어 두 번째로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 그가 박정희를 향해 재차 방아쇠를 당기자 권총은 "철컥" 소리만 내고 실탄이 터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밖으로 뛰어나가 박선호의 권총을 뺏어 들고 다시 주연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술 시중을 들던 여대생 신 모양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채 쓰러져 있던 박정희에게 다가갔다. 권총을 머리 정수리 뒤통수 쪽에 가까이 겨누었다. 여대생은 충격적인 광경에 놀라 뛰쳐 일어나 몸을 피했다. 이어 권총이 불을 뿜었다. 마피아 영화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확인사살이었다. 김재규의 이런 확인사살은 인간적 환멸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그는 또 군사재판에서 검찰관이 "대통령 각하께서 병원으로 실려 가는 것을 알았느냐"고 묻자 "알았더라면 후송하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냉혹한 결행이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1심에서는 박정희의 술과 여자에 대해 진술을 자제했다. 변호인 신문에서 그 얘기가 나오면 군검찰 관이 즉시 답변을 제한했다. 박선호에게 박정희의 사생활 문제에 대해 파고든 사람은 강신옥 변호사였다. 10•26 당일 연회가 시작되기 전 박선호의 행적이 플라자호텔을 거쳐 내자호텔을 다녀 온 것으로 드러났다.
강 변호사는 "플라자호텔에 간 일이 있지요?"라고 물었다. 순간 뒤에서 "야, 얘기하지 마!"라는 작은 외침이 터졌다. 김재규가 박정희의 사생활 공개에 대한 박선호의 진술을 제지한 것이다. 강 변호사는 이어 "플라자호텔에서 내자호텔로 간 것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라고 물었다. 이에 박선호는 "상상에 맡기겠습니 다"고 답변을 거부했다.
박선호는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2심 재판에서 심경의 변화를 보이는 듯했으나 끝내 양심선언을 하지 않았다. 강신옥 변호사의 신문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 문제는 제가 답변하게 되면 그분들이 지금 일류 배우들로 활동하고 있고, 역효과가 나고, 사회적으로도 혼란을 일으키고 고인을 욕되게 하므로 피했습니다."
2심 재판 중 심경의 변화를 보이면서 궁정동 안가 술자리에 왔다 간 연예인 명단을 밝힌 사람은 김재규였다. 김재규는 1980년 1월 어느 날, 강신옥 변호사를 보자고 면담 신청을 했다. 강 변호사는 박선호를 담당해 변론하면서 채홍사의 역할과 관련해 박정희의 술자리 여자에 대해 파고들었다. 그것이 알려지면 10•26 사건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지 않을까 착안한 것이다. 김재규는 강 변호사에게 궁정동 안가에 와서 박정희의 소행사·대행사에 동석했던 연예계 여인들의 이름을 증언했다.
강 변호사는 이것을 검증하기 위해 박선호에 앞서 중정 의전 과장을 지낸 윤모•이모•김모(육사 15기, 예비역 대령) 씨를 만났다. C, C1, C2, L, L1, W….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입을 다물지 못할 TV드라마와 은막의 유명 일류 스타들이 박정희의 술자리에 왔다 갔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는 법정에서 진술한 것이 아니어서 공적 기록이 아니라 강 변호사가 메모한 대학노트에 접견록으로 남았다.
10•26 가담자 중에서도 박정희의 사생활 문제를 직접 아는 사람과 모르는 경우는 군사법정 진술이 달랐다. 대표적으로 궁정동 안가 주색행사를 관리했던 박선호는 자신이 10•26 사건에 가담한 사실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직속상관인 김재규 중정부장의 지시에 조금도 그 정당성을 고민하지 않고 충실하게 따랐다.
이에 비해 궁정동 안가의 일에 대해 직접 알지 못하는 김재규의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육사 187)은 10·26 당일 궁정동 안가 현장에서 거사 얘기를 처음 듣고서 놀랐고 마음이 혼란스러웠다고 진술했다. 박정희의 사생활에 대해 가까이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던 그는 박정희를 제거하려는 그날의 행동 계획을 듣고 크게 당황했다고 진술했다.
30여 년 전인 1993년, 김영삼 정부 초기의 일이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이던 나는 10·26 박정희 살해사건을 취재하고 1993년 4월부터 1년 동안 특집기획 시리즈로 신문 지면에 장기 연재했다. 궁정동 안가 비밀 요정과 박정희의 사생활 문제를 10•26 사건의 주요 원인으로 다루었는데 주로 식자층에서 "점잖지 못한 접근법"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대학교수 중에도 그런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남자의 허리 아래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 법이라는 얘기들이었다.
그러나 김재규가 '상관이며 은인이며 가족과도 같은 박정희'를 어느 날 갑자기 권총으로 쏜 10•26 사건에 대해 상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구나 권총 한 발도 아니고 뒤통수에 대고 확인사살까지 한 것이나 병원으로 후송하려는 것을 알았다면 막았을 것이라는 진술을 보아도 사건은 권력 내부의 힘겨루기나 알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내밀한 문제를 품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변호인단이 군사재판 중 김재규와 박선호와의 문답 과정에서 찾아낸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였다.
중정 의전과장으로 박정희의 궁정동 안가에 외부 여자를 조달하는 채홍사역을 했던 박선호가 박정희에게 드러낸 인간적 환멸과 실망감은 단순한 사생활 차원이 아니었다. 거기엔 엄중한 국가지도자로서의 기본 규범과 금도에 대한 공분과 규탄 같은 것이 내재해 있었다. 군사재판 1심 초기에 변호인이 박선호에게 여자 조달에 대해 신문하자 김재규가 "야, 얘기하지 마!"라고 소리친 것도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될 권력 내부의 내밀한 금기 사항임을 방증했다.
변호인단이 박선호의 전임 중정 의전과장들과 가진 면담에서는 대통령 전용 병실 간호사가 임신하자 중절수술을 시킨 일도 거론됐다. 1인 유신독재체제 아래서 누구도 견제할 수 없었던 절대권력자의 타락상이었다. 이런 타락상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위치가 바로 중앙정보부장과 의전과장이었다. 그들이 절대권력자에 대해 가졌던 인간적 환멸감과 공분이 10·26 사건의 중요한 동기라고 보아야 할 이유다.
견제 없는 권력은 언제 어디서나 타락하고 멸망하기 마련이다. 김재규는 박정희에 대한 인간적 환멸과 함께 한 국가의 통치 권자로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부마 지역을 시작으로 국민에 대한 살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았기에, 그는 다수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각하 한 사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이에 대한 정당방위론과 내란 목적 살인이라는 대척적 견해 사이에서 김재규 재심이 진행될 것이다. 이는 박정희 평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역사 재판이다.
사회적•정치적•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본 박정희의 공과(功過)
지금까지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지지도 국민 여론조사에서 박정희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정상적인 평가 위에서 존경받는 것이 아니어서인지 '박정희 신드롬'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일본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5•16 쿠데타의 명분이었던 빈곤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다는 평가에 힘입어 박정희는 높은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덕인지 아니면 국민의 불굴정신과 분투 결과인지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의 질적 발전을 알려주는 지표들인 실업률•물가상승률•인플레이션•구매력 기준 실질 국민소득 등은 개발독재가 종식되고 민주 정부에 들어선 후 그 이전에 비해 급격히 향상됐다. 이는 국제경제기구 중에서도 가장 신뢰받는 세계자료은행(World Databank)의 데이터로 입증된다.
한국의 고속 경제성장에 대해 한국민의 투지와 불굴정신을 높이 평가한 연구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연구의 권위자인 에즈라 보겔(Ezra Feivel Vogel) 하버드대 교수가 쓴 《네 마리의 작은 용: 동아시아에서 산업화의 확산》이라는 책 이다. '네 마리의 작은 용'은 대만•한국•홍콩•싱가포르를 뜻한다. 한국의 경제성장 배경에 대해 한국민의 투지를 강조하는 보젤 교수의 실증적 분석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책에서 "일본인들은 고도 경제성장기에 주당 근로시간이 50시간을 넘지 않았으나 한국민의 경우 이것이 60시간에 달한다"고 놀라워했다. 한국민은 1980년대 말에도 주당 55시간으로 다른 개발도상국들보다 평균 10시간 이상 더 일했다는 것을 부각했다. 이 같은 한국민의 투지가 혹독한 열사의 땅 중동 건설현장에서도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며 다른 경쟁자들을 따돌렸다는 것이다. 보겔 교수는 이 같은 한국민의 불굴의 정신에 대해 "일본 식민주의의 억압과 참혹한 6•25 전쟁을 겪은 결과"라고 평가하고 "3•1 운동과 4·19 혁명의 경험이 그 배경"이라고 분석 했다.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이 일본 식민지배 인프라나 군사정권의 개발독재 덕택이라고 주장하는 역사 왜곡 인사들에게 확대 복사라도 해서 보내고 싶은 대목이다. 더구나 군사정권 종식과 민주화 이후 K팝·영화•드라마•게임 등 한류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것은 안팎의 수많은 역경을 극복한 불굴정신이 문화적 창의력으로 재탄생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평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사례가 중국의 마오쩌둥이다. 서로 활동한 무대와 족적에서 큰 차이가 나고 비교의 수준이 다르지만, 장기집권자라는 공통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을 평가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덩샤오핑의 '공칠과삼(功七過三)론'이다. 마오쩌둥에 대해 긍정적인 공로가 7이고 과오가 3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인들 대상 설문조사에서 항상 진시황이나 명 태조 주원장과 함께 3대 존경받는 지도자로 꼽힌다. 중국 공산혁명과 정권 수립 과정에서 정적 제거 등 사악한 행적도 많이 보였지만 천하 통일을 이루었고 중국의 근대국가 기틀을 다진 통치자로 평가받아 왔다. 덩샤오핑도 마오쩌둥 생전에 정치적 숙청과 하방에 시달렸지만 마오에 대한 평가에선 상당히 합리적 태도를 견지하고 후하게 채점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비교해서 박정희의 경우 공칠과삼 수준이 될 수 있을지, 역으로 공삼과칠인지 분석적 평가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선택지를 하나 더 제시한다면 6대 4, 공육과사 또는 공사과육을 놓고 토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공과의 차이가 클수록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는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 재판에서 평가 기준이나 양형 기준을 아무리 정밀하게 만든다 해도 누구나 수긍하는 과학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정희의 평생 족적에 대해 중요한 정책 수행과 사건들을 정량적 조사 방법으로 분석하고 종합해야 하겠지만, 인문학적 차원의 정성적 평가가 더 의미 있는 역사 평가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예컨대 개발독재에 의한 경제성장에 대해 순수 경제학적 관점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초래한 사회적·정치적•문화적 결과에 대해 함께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의 유신독재정권이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어느 정도 효율성을 발휘했다는 점에 대해 도외시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의 심장을 권총으로 쏘아버린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죄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수 국민 희생 막기 위해 한 사람을 제거한 정당방위
최고권력자에게 신임을 받던 최측근이 어느 날 갑자기 상관의 목숨을 빼앗은 사건으로 변호인단은 김재규를 고대 로마제국의 황제 시저를 살해한 브루투스에 비유했다. 브루투스는 거사 후 "나는 시저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로마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죽였다"고 외쳤다. 시저가 로마 공화정을 폐지하고 황제에 오르자 브루투스는 양아버지로 섬기던 그에게 어느 날 등을 돌리고 살해 모의에 가담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박정희에게 권총을 쏜 이유에 대해 "다수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나의 가족과도 같은 각하 한 사 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면서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토로했다. 다수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각하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고 각하를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자유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면서 "이는 각하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이미 12•12 군사반란으로 실권을 쥔 상태에서, 군사재판의 재판부가 인용할 것으로 기대하기란 불가능했고 이럴 때 흔히 역사 재판에 맡긴다는 말로 가름할 수밖에 없다. 이제 45년 지난 오늘의 사법부가 그의 유족들이 신청한 재심에 대해 과연 제대로 역사 재판을 할 수 있을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공화정을 지키려는 브루투스의 외침이나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역사적 대의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기 정당화와 변명으로 보아야 할지 평가는 엇갈려 왔다. 김재규는 10•26 거사 후 후속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 집권 욕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박정희를 제거한 후 자신이 집권할 생각이었다면 치밀한 후속 행동 계획이 나와야 했다. 그러나 그는 거사 후 자신의 아지트인 중앙정보부로 가지 않고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의 말 한마디에 따라 국방부와 함께 위치한 육군본부 벙커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거기서 체포되고 10•26 거사는 독재자 한 사람을 제거한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박정희가 키워 놓은 정치 군벌 하나회 집단에 의한 5•18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살상 진압과 내란이라는 거센 복고 역풍을 맞게 된다. 역사 퇴행 속에서도 10•26 사건이 김재규의 사욕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며 그런 점에서 역사적 대의에 입각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재규가 군사법정에서 누차 진술한 대로 박정희는 자신의 가족과도 같은 상관이어서 의리를 지키지 않고 배신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상존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 의리와 배신이란 사회적 기본윤리의 문제다. 그러나 역사적 대의와 공적 명분에 바탕한 행동에 대해 의리와 같은 개인적 규범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관점이 중요하다.
김재규가 군사재판에서 진술한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말은 표변(豹變)이란 어의를 적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동양 고전 《주역》의 한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군자는 표변(豹變)하고 소인은 혁면(革面)한다."
표변이란 표범의 털 무늬가 가을이 되면 완전히 바뀌어 전신이 아름다운 색깔로 변하는 것을 뜻한다. 가을철 표범의 털 무늬처럼 마음과 행동을 갑작스럽게 바꾼다는 비유적 묘사다. 군자는 평소 행실이 바르고 어질며 덕이 높은 사람으로 한번 마음을 고쳐먹으면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의미다. 표변에 비해 혁면이란 얼굴과 겉표정만 고친다는 뜻이다.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회주의적으로 껍데기만 고치는 것이 군자와 대비되는 소인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김재규의 표변 행동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제대로 자리매김 되기 바라는 마음 을 부족하나마 이 책에 담고자 했다.
5• 18 광주민주항쟁 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기하자
김재규의 10•26 거사로 유신독재체제는 무너졌지만 12•12 군사반란으로 군권이 박정희의 친위대로 키워진 정치 군벌 하나회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복고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군권을 탈취한 하나회는 민주헌정의 회복을 요구하는 5•18 광주민주항쟁을 냉혹하게 짓밟았다. 당시 광주의 시민•학생들은 진압군에 포위되고 고립됐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시민군과 자치공동체를 꾸려 저항했다. 이같이 불의에 저항하고 민주헌정 회복을 요구한 5•18 정신이야말로 3•1 운동이나 4•19 혁명과 동질적 연장 선상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5• 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기하라는 요구는 여기에 근거한다.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기함으로써 그에 대한 역사 왜곡 세력에게 교훈을 주고 미래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전수할 수 있는 토대를 확고히 해야 한다.
이 책은 10•26 군사재판의 1심 공판 10개 회와 2심 공판 4개 회의 전 녹음을 정리하고 당시의 정치 상황을 가미한 것이다. 내가 동아일보 기자 때인 1993~1994년 기획 시리즈 '군 - 어제와 오늘'을 취재 집필하는 과정에서 10•26 군사재판 전량인 60여 시간 분량의 녹음테이프를 입수했다. 당시 계엄사 군법회의 관계관 출신인 '의인'에게 감사한다. 녹음 내용 중 중복되는 문답을 제외하고 의미 있는 것만 골라 200자 원고지 4,000여 장으로 정리했다. 이것을 신문의 시리즈로 활용한 뒤 두 권의 책으로 엮어 냈으며, 또한 김재규와 박선호의 최후진술 녹음테이프를 별도 단행본의 부록으로 붙여 공개한 바 있다. 이 책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기 위해 새로운 서문을 작성해 재출간하는 것임을 밝힌다
이 책을 10•26 이후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항쟁 전후의 내란집단에 의한 피해자들에게 바치고자 한다. 나 또한 5•18 광주민주항쟁을 보도하기 위한 검열거부 등 언론자유 투쟁을 벌이다 당시 보안사가 내려보낸 명단에 따라 신문사에서 축출된 강제해직 기자로 소회가 남다르다. 그에 앞서 대학생 때인 1971년 10•15 위수령 당시 반 박정희독재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중정과 경찰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등 정치군인 정권과 악연이 깊다. 그러나 주관적 편견에서 벗어나 실증적 자료에 의존하려 최대한 노력했으며, 책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이 민주화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71동지회 동료들과 언론자유 투쟁을 함께 했던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의 선후배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지난 10월 16일 치러진 서울시 교육감 보궐선거에서 정근식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의 총괄상임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사와 해방 후 군사독재 및 5·18 광주민주항쟁 등 현대사에 관한 올바른 역사교육을 강조했다. 그가 서울시 교육감으로 당선됨으로써 역사교육이 바로 설 수 있게 돼서 큰 보람을 느끼며 이 책 또한 현대사 교육의 한 자료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전직 17대 국회의원으로서 국회도서관 의원열람실을 집필실로 삼을 수 있어 큰 복이다. 의원열람실의 정경순 사서가 따뜻하게 지원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한다. 마지막으로 오랜 기간 고락을 함께하고 지원해준 아내(용경식 번역문학가)와 세 아이, 먼저 소천하신 아버지(김영길)와 어머니(김정숙)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24년 11월 국회도서관에서
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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