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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3 00:23:39

어린 시절 우리 집 주변엔 야트막한 담장너머로 붉은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던 것을 기억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짙푸른 잎사이로 손가락 굵기만한 벌레들이 기어다니고 그 사이로 바쁘게 왔다갔다 하며 지저귀던 새소리 또한 기억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건물들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하면서 나무도 새도 벌레도 자취를 감추고 그곳엔 콘크리트 벽과 주차장들이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일렬로 늘어선 많은 콘크리트벽들은 그저 무표정한 색깔을 뒤집어 쓴 채 도시를 채우고 있다.

건축물에서 일반적으로 북쪽으로 난 벽을 제외한 다른 벽들은 계절적인 일광 리듬 속에서 햇볕을 받고 데워진다. 특히 남쪽 벽면은 동서벽면과 달리 태양열을 가장 많이 받게 되며 겨울철에 수평면의 3~4배 정도의 열량을 얻는다. 반면 여름에는 3분의 1정도 열을 받는다.

건축물에서 외벽은 햇볕을 받아들이는 면과 기후조절을 위한 열 축적 시설이 될 뿐만 아니라,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벽면를 타고 오르는 식물을 심게 되면 태양열을 받기 유리해 식물이 잘 자라며 건물에서 열이 빠져나가거나 외부의 기후조건 등을 완화하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한여름 벽을 타고 무성하게 자라는 식물은 도심에 사는 사람들에게 푸르름 뿐 아니라 건물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게 되며 더욱이 이러한 환경이 인간만이 아니라 작은 벌레와 새들까지도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터를 만들어 주니 더할 나위 없이 많은 기능을 하는 셈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벽을 타고 자라는 식물들은 벽면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식물이 70년 이상 외벽 마감상태를 손상시키지 않고 보호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조그마한 뿌리들 대신 점착판들로 고정되어 있는 담쟁이덩굴의 덩굴손은 외벽마감 사이의 빈틈으로 침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잎의 앞면과 뒷면은 여름철 낮에 5℃ 정도의 온도차를 낼 정도로 냉각효과가 크다.

벽면 녹화는 큰 면적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도시에서 식물의 생장을 증대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특히 조밀하고 교통량이 많은 도심지역에서는 ‘푸른 외벽’이 제공해주는 냉각 효과, 공기 정화와 소음 흡수 효과 등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큼 그 효과가 크다. 외벽의 녹화를 통해 건물이 하나의 식물섬을 만든다면 이것이 궁극적으로 연결되어 도심속 ‘그린네트워크’를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자리할 수 없는 도시에 우리의 벽 한쪽을 내어 준다면 인간은 푸르름과 곤충, 새와 더불어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태구/세명대 건축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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