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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누가 재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인은 서양인보다 장의 길이가 80cm가량 길다고 한다. 그래서 몸의 허리 부분이 길어져 어쩔 수 없는 ‘숏다리’란다. 장이 길어진 것은 오랜 세월 채식을 많이 해왔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채소나 곡류에서 영양분을 다 흡수하려면 음식물이 장에 머무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초식동물은 육식동물보다 장이 길다.
한국인의 채식 습관은 어떤 철학적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국과 찌개가 발달하고 멍멍탕까지 먹는 것을 보면, 아마 육류가 부족해서 채식을 주로 해온 것이리라. 채식으로 숏다리가 된 한국인은 서양인보다 대장암에 훨씬 덜 걸린다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자.
‘기근’이란 말은 우리 조상들에게 채소 농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조상들은 곡식이 여물지 못해 생기는 굶주림을 기(飢)라 하고, 오곡이 아닌 채소가 자라지 못해 생기는 굶주림을 근(饉)이라 했다. 한국인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나물을 먹는 민족일 것이다. 일제 말의 한 연구에 따르면, 농촌에서는 무려 304가지나 되는 식물을 먹었다고 한다. 독이 없는 것은 다 먹었고, 고사리처럼 서양에서는 독초로 구별하는 것도 우려서 독을 약화시키고 먹는 게 한국인이다.
채소라면 가장 먼저 쌈거리를 떠올리게 된다. 외국에 나가 사는 한국인들은 빈 땅이 보이면 가장 먼저 상추와 들깨를 심을 만큼 쌈거리는 우리 음식문화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쌈거리 채소의 종류를 꼽아보면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으뜸은 역시 이름 자체가 날로 먹는 채소(생채)인 상추다. 천금을 주고 씨앗을 샀다는 천금채라는 옛 이름에 상추의 명성이 담겨 있다. 여기에다 어류나 육류의 독을 중화해준다는 들깻잎, 쓴 맛에 향기가 진한 쑥갓, 배춧속 정도가 날로 먹는 대표적인 쌈채소다. 쌈밥 재료로는 이 밖에 숙쌈인 호박잎이 있고 김과 미역도 있지만, 날채소는 아니다. 아주까리나 취의 이파리는 묵나물로 먹는다.
그런데 요즘 상점의 채소 코너에 가면 이름도 생소한 쌈채소가 참 많아졌다. 외래종들이다. 5월 초 모종가게에 가면 수많은 쌈채소용 모종을 파는데, 이를 사다가 직접 길러먹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도 올해는 농장에 케일, 엔다이브(나도 한때는 치커리로 착각했다), 레드 치커리, 겨자를 심었는데, 쌈거리가 한결 풍부해졌다. 밭들을 한 바퀴 돌아봤더니 참나물, 신선초, 적치(붉은잎 치커리), 꽃케일, 오크리프까지 심은 밭도 간혹 눈에 띈다.
쌈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로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화단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옥잠화의 이파리로 싼 쌈이다. 옥잠화의 커다란 잎은 평소에는 먹지 않는데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을 때면, 그 큰 잎을 씻어 그냥 쌈을 싸먹곤 했다. 옥잠화 쌈밥은 목을 크게 열고 넘어가면서 가시를 함께 쓸어내려갔다. 의사들은 말릴지 모르지만, 변변한 수단이 없던 내 어릴 적에는 그것이 약이었다. 내 고향집 장독대 옆에는 지금도 옥잠화가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