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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의 추억

Escaper 2023. 2. 2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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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한번은 점심 때 아버지를 모시고 보리비빔밥집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단호히 고개를 저으셨다. “난 안 먹는다.” 쌀밥 한번 실컷 먹고 싶던 그 옛날 한이 그때까지도 다 풀리지 않으셨다는 걸 난 모르고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수제비를 싫어한다. 끓는 물에 밀가루 반죽을 아무렇게나 떼어넣고 끓여 양념간장을 끼얹은 수제비를 나는 어린 시절 물리도록 먹고 자랐다. 아무리 유명한 식당의 수제비도 그 기억을 지워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절 그렇게 많이 먹던 고구마는 지금도 맛있으니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나는 지난해에도 주말농장에서 고구마를 길렀다. 고구마는 5월 중순 또는 하순께 모종을 사서 옮겨심기를 하는데, 올해는 직접 모종을 길러보려고 씨고구마 하나를 일찌감치 땅에 묻었다. 새 줄기와 잎이 무성하게 자라면, 그것을 3~4마디씩 잘라 옮겨심으면 된다. 어릴 적 고구마 모종을 옮기는 날엔 꼭 고구마를 간식으로 먹은 기억이 난다. 씨고구마에서 자라난 새 줄기의 뿌리에 햇고구마가 달리는데, 덜 여문 것을 그냥 찐 것이다. 씨고구마는 줄기와 잎을 키우느라 영양분이 많이 빠져나가고 섬유질만 앙상하게 남는다. 자식을 기르느라 폭삭 늙어버린 부모처럼.

몇해 전에는 화분에서 고구마를 길러보기도 했다. 덩이뿌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꽃을 보기 위해서였다. 어릴 적에는 고구마는 꽃이 피지 않는 줄 알았다. 평생 농사를 지으신 아버지도 여태 고구마 꽃을 본 적이 없다고 하실 만큼, 고구마는 아주 드물게 꽃을 피운다. 식물은 생존이 위협받을 때 번식을 준비하는데, 고구마는 무성생식에 너무 익숙해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기능이 퇴화한 것일게다.

그해 내 화분의 고구마도 결국 꽃을 피우지 않았다. 두해살이를 시켜보면 어떨까 하여 방 안에서 키우며 겨울을 넘겨보기도 했는데 이듬해에도 꽃은 피지 않았다. 고구마를 길러 꽃을 봤다는 사람에게 들으니, 큰 자루에 부엽토만 가득 넣고 그 안에 고구마를 심었더니 초가을에 꽃이 피더라 했다. 솔깃해서 나도 한번 그렇게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무 줄기를 비틀어 억지로 모양을 만드는 분재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고구마는 메꽃과에 속한다. 사진으로 본 고구마꽃도 작은 메꽃처럼 생겼다. 메꽃은 사람들이 흔히 나팔꽃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인데, 메꽃과 나팔꽃은 사촌간으로 모양은 비슷해도 다른 꽃이다. 빨강이나 파랑의 원색이 진한 것이 나팔꽃이고, 연분홍으로 피는 것이 메꽃이다. 이파리 모양도 다르다. 고구마의 친척인 메꽃의 뿌리에도 녹말이 많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흉년이 들었을 때 메꽃 뿌리를 캐먹기도 했다고 한다.

유중림 선생이 1766년에 쓴 <증보산림경제>에는 그 무렵 막 우리나라에 들어온 고구마 재배법이 자세히 실려 있다. 이 책에는 바닷가 사람들이 오래 사는 이유도 고구마를 많이 먹어 그렇다고 쓰여 있는데, 핵심은 역시 ‘흉년을 구제하는 데 제일인, 실로 천하의 기이한 식물’이라는 것이다. 도심의 전봇대를 감아오르는 나팔꽃이나 화단에 홀로 한 송이 핀 메꽃을 볼 때마다 나는 고구마꽃을 생각한다. 그때마다 내 어릴 적 방 윗목, 수수깡을 둥글게 엮어 만든 큰 통에 가득 쌓여 있던 고구마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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