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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책

동인도회사, 제국이 된 기업

Escaper 2025. 11. 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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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dNX5_ahn1A?si=1Z0OIbZwN4aNsxAO

 

프롤로그

가장 먼저 영어에 들어온 인도 단어 가운데 하나는 약탈품이나 전리품을 뜻하는 힌두스타니어 속어인 ‘루트 loot’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이 단어는 18세기 말까지 북인도 평원 지대 밖에서는 거의 들을 일이 없다가 어느새 영국 곳곳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 되었다. 루트가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그 머나먼 곳에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웨일스와 잉글랜드 접경지에 있는 파위스 성 Powis Castle을 한번 들러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웨일스 최후의 세습 군주인 잊을 수 없는 이름의 오와인 그리피스 압 그웬윈윈 Owain Gruffith ap Gwenwynwyn은 13세기에 이 울퉁불퉁한 언덕 요새인 파위스 성을 지었다. 그 대저택과 영지는 그가 웨일스를 버리고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를 받아들인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파위스 성에 소장된 가장 눈부신 보물들은 훨씬 후대에 이루어진 잉글랜드의 정복과 약탈에서 유래한다.

파위스 성에는 18세기에 영국 동인도회사 East India Company: EIC가 인도에서 가져온 제국의 약탈품이 넘쳐난다. 웨일스 시골의 이 사유 저택에 인도의 어느 곳, 심지어 델리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것보다 더 많은 무굴 공예품이 쌓여 있다. 파위스 성의 호화로운 수장품 가운데는 자줏빛으로 물들인 흑단을 상감한 광택이 나는 금제 물담배, 멋들어진 명문을 새긴 바다흐샨 첨정석 尖晶石과 보석이 박힌 단검들, 비둘기의 핏빛 색깔로 반짝이는 루비와 여기저기 널린 초록 도마뱀 색깔의 에메랄드 등이 있다. 사파이어와 노란 토파즈를 박은 호랑이 머리 박제들, 옥과 상아로 만든 장신구, 양귀비와 연꽃 그림을 수놓은 비단 걸개, 다양한 힌두 신상과 화려한 코끼리 의장도 있다.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에는 소유주들이 패배하고 죽임을 당한 뒤 가져온 두 개의 커다란 전리품이 서 있다. 바로 벵골 나와브인 시라지 우드다울라가 플라시 전장에서 도망치며 남기고 간 가마와 마이소르의 호랑이로 불린 티푸 술탄의 군영 천막이다.

이런 보물들이 워낙 눈길을 사로잡아 지난여름 그곳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이 모든 약탈품이 이곳으로 오게 된 연유를 설명하는 거대한 캔버스를 놓칠 뻔했다. 그 그림은 짙은 떡갈나무 판자를 댄 계단 꼭대기의 목조 내실 內室 문간 어둑한 곳에 걸려 있다. 걸작은 아니지만 가까이 가서 살펴볼 만하다. 금실로 짠 옷을 걸친 유약해 보이는 한 인도 군주가 비단 캐노피 (제단이나 옥좌 위에 기둥으로 받치거나 매달아 놓은 덮개―옮긴이) 아래 옥좌에 앉아 있다. 그의 왼쪽에는 언월도와 창을 든 병사들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분을 뿌린 가발을 쓴 조지 왕조 시대 신사 무리가 있다. 군주는 빨간 프록코트를 입고 살짝 과체중인 한 영국인의 손에 선뜻 두루마리를 건네고 있다.

이 그림은 델리에서 쫓겨나 객지를 떠돌며 동인도회사 (이하에서 다른 설명이 없는 한 ‘동인도회사’나 ‘회사’는 전부 영국 동인도회사를 가리킨다—옮긴이) 군대에 패배한 젊은 무굴 황제 샤 알람이 요즘 같으면 강제 민영화라고 부를 행위에 내몰린 1765년 8월의 어느 정경을 보여준다. 이 두루마리에서 황제는 영국 동인도회사를 “드높고 강대하고, 지체 높은 귀족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며, 빛나는 전사들의 우두머리요, 짐의 충성스러운 종복이자 진실한 지지자, 짐의 은전을 받기에 마땅한 영국회사”라고 칭하며 벵골과 비하르, 오리사의 무굴 징세관을 해임하고 그들을 벵골의 신임 총독 로버트 클라이브와 회사의 이사들이 임명한 일단의 영국인 무역상으로 교체한다고 밝힌다. 그 이후 무굴 제국의 징세 업무는 이 막강한 다국적 기업에 하도급되었고, 그 기업은 징세 활동을 회사의 사설 군대로 보호했다.

회사는 창립 칙허장에 따라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고, 1602년 최초 항해에서 포르투갈 선박을 나포했을 때부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다. 더욱이 회사는 1630년대 이래로 인도 정착지 주변의 소규모 지역들을 지배했다. 1 1765년은 동인도회사가 비단과 향신료를 취급하는 일반적인 무역회사와 조금이나마 닮은 구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훨씬 더 독특한 존재가 된 중요한 시점이었다. 단 몇 달 만에, 250명의 회사 직원들은 현지에서 모집한 인도 병사 2만 명이라는 군사력을 등에 업고 무굴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들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국제적 기업은 침략적인 식민 권력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회사 소유 병력이 거의 20만 명으로 불어난 1803년에 이르면 회사는 아대륙 전체를 신속히 복속시키거나 직접 장악했다. 놀랍게도 이는 반세기가 채 걸리지 않았다. 최초의 본격적인 영토 정복은 1756년에 벵골에서 시작되었다. 47년뒤에 회사의 영토는 북쪽으로 무굴의 수도 델리까지 이르렀고, 그때쯤 델리 이남의 인도 거의 전체를 실질적으로 시티 오브 런던 the City of London (런던의 상업, 금융 중심지. 줄여서 그냥 ‘시티’라고도 부른다—옮긴이)의 이사회실에서 다스리고 있었다. “궁둥이 씻는 법도 모르는 한 줌의 무역상에게 명령을 들어야 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명예가 남아 있으랴?”라고 무굴의 한 관리는 탄식했다. 2

우리는 지금도 영국이 인도를 정복했다고 말하지만 그 표현은 더 음험한 현실을 가린다. 18세기 중반에 인도의 커다란 땅덩어리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장본인은 영국 정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런던에서는 창문 다섯 개 너비의 자그마한 사무실에 본사를 두고, 인도에서는 폭력적이고 인정사정없고 간혹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기업 약탈자 클라이브가 경영한 규제되지 않은 위험한 민간 회사였다. 인도에서 식민주의로의 이행은 오로지 투자자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한 영리 기업 치하에서 일어났다.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시대 전성기에, 영국이 수상쩍고 무자비한 장사꾼의 방식으로 인도를 지배했다는 것은 영 창피한 일이었다. 빅토리아인은 역사의 진짜 본질은 국민국가 nation-state의 정치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부패한 기업들의 경제가 아니라 정치가 근본적인 연구 대상이자 인간사에서 진정한 변혁의 동력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그들은 제국을 문명화 사명으로 생각하길 좋아했는데, 그들에게 제국이란 서양에서 동양으로 지식과 철도, 문명의 각종 이기들을 자애롭게 국가적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를 열어젖힌 기업의 약탈에 관한 기억은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상실되었다.

두 번째 그림은 윌리엄 로텐슈타인 William Rothenstein이 의뢰를 받아 영국 하원 회의장 벽에 그린 것으로, 그 같은 과정에 대한 공식 기억을 빅토리아인들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제시하고 교묘하게 재가공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브리튼 건설 The Building of Britain〉이란 제목의 벽화 시리즈의 일부로, 소리가 웅웅거리는 접견 공간인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의 세인트스티븐스홀에서 지금도 볼 수 있다. 벽화 시리즈는 877년 데인족을 격퇴하는 알프레드 대왕,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 통합 등등 당시 작품 선정위원회가 영국사의 하이라이트이자 전환점들이라고 간주한 것을 보여준다.

이 시리즈에서 인도를 다룬 벽화는 캐노피 아래 높은 단상에 앉아 있는 또 다른 무굴 군주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사방에서 수행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다시금 한 영국인이 무굴 황제 앞에 서 있는 궁정 배경과 마주한다. 하지만 이번에 권력 균형은 매우 다르다.

여기서 제임스 1세가 무굴 궁정에 파견한 대사인 토머스 로 경 Sir Thomas Roe은 자한기르 Jahangir 황제 앞에 서 있고, 때는 무굴 제국이 여전히 부유하고 막강하던 1614년이다. 자한기르는 아버지 아크바르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양대 정치체 중 하나를 물려받았는데, 그에 견줄 만한 나라는 명나라뿐이었다. 그의 영토는 인도 대부분,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전부와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에 뻗어 있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보다 다섯 배나 많은 인구—대략 1억 명—를 다스렸고 그의 백성은 전 세계 제조품의 4분의 1가량을 생산했다.

자한기르의 아버지 아크바르는 그가 ‘미개인 집합’이라고 묘사한 인도의 유럽인 이민자들을 문명화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해볼까 잠시 고려했지만 나중에 그 계획이 실행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그만뒀다. 이국적 물건과 야수를 모으는 취미가 있던 자한기르는 인도에 최초로 칠면조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의 열정으로 토머스 로 경을 환영했고 유럽의 특이한 풍물에 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원에 어떤 그림을 걸지 계획한 위원회에게 이 사건은 영국과 인도의 첫 만남이었다. 두 국민국가가 처음으로 직접 대면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첫 장이 보여주듯이,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실제로는 외교와 국왕 사절 간의 만남이 아니라 윌리엄 호킨스 William Hawkins 선장, 다시 말해 아그라에 도착하자마자 황제가 신붓감을 주겠다고 하니 덥석 받아서 좋다고 그녀를 영국까지 데려온 회사 소속 술꾼 선장이 이끈 무역 항해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하원 작품 선정위원회가 망각하기로 한 판본의 역사다.

여러 측면에서 동인도회사는 상업적 효율의 본보기였다. 창립 후 100년이 지났을 때도 본사에는 상근 직원이 35명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 최소한의 인원은 역사상 유례없는 기업 주도의 정변을 일으켰다. 남아시아의 광대한 영토의 군사적 정복과 복속, 약탈로 일궈낸 그 성공은 세계 역사상 최대의 기업 폭력 행위일 것이 거의 틀림없다.

역사가들은 동인도회사의 놀라운 성공에 다양한 이유를 제시한다. 무굴 인도가 상호 경합하는 자잘한 국가들로 쪼개진 상황,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적 혁신이 유럽의 동인도회사들에 부여한 군사적 우위, 그리고 특히 영국 동인도회사가 언제든 거액의 현금을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해준 유럽의 통치, 과세, 금융상의 혁신 등이다. 진홍색 제복과 팔라디오 양식의 대저택, 호랑이 사냥과 총독 관저에서 열리는 무도회 뒤편으로는 손익을 낱낱이 적은 장부와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등락을 거듭하는 회사의 주가 기록과 더불어 회사 회계사들이 작성한 대차대조표가 항시 놓여 있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동인도회사가 영국 의회로부터 누린 지원이었다. 양자 관계는 18세기 내내 꾸준하게 공생하는 성격을 띠더니 궁극적으로는 오늘날 공공-민간 파트너십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변신했다. 클라이브처럼 귀국한 네이봅 nabob (인도의 제후를 가리키는 ‘나와브 nawab’가 와전된 단어로, 동인도에서 부와 권력을 쌓은 벼락출세자를 가리킨다. 용어해설도 참조하라—옮긴이)들은 축적한 부를 이용해 의원과 의석, 즉 악명 높은 ‘부패 선거구’를 사들였다. 한편 의회는 국가 권력으로 회사를 지원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서로에게 대포를 겨눌 때 필요한 선박과 병사의 형태로 말이다.

회사는 언제나 두 가지 대상을 염두에 두었다. 하나는 회사가 사업을 벌이는 땅이었고, 다른 하나는 회사를 탄생시킨 나라였다. 회사의 변호사와 로비스트, 회사의 주주인 의원 들은 서서히 눈에 띄지 않게 회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의회의 입법에 영향을 미치고 왜곡시켰다. 아닌 게 아니라 동인도회사는 기업 로비 활동을 발명한 회사일 것이다. 1693년, 창립된 지 100년도 지나지 않아 회사는 저명한 의원과 장관 들에게 연간 1,200파운드를 쏟아부으며 최초로 자사 주식을 이용해 의원을 매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세계 최초의 기업 로비 스캔들인 이 사건을 조사한 의회는 회사가 뇌물 공여와 내부자 거래를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는 추밀원장 탄핵과 회사 회장의 투옥으로 이어졌다.

회사의 총영업자본은 영구적으로 국가에 대부된 상태였지만 (사실상 반 半국가기업이라는 의미—옮긴이), 회사는 필요할 때는 자신들이 정부와 법적으로 별개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일례로 회사의 인도 영토를 보호하는 육해군 작전에 영국 정부가 엄청난 비용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1765년에 샤 알람이 서명한 문서—디와니로 알려졌다—는 법적으로 국왕정부 the Crown의 소유가 아니라 회사의 소유라고 강하게 주장해 결국 뜻을 관철했다. 하지만 이러한 법적 구분을 인정하는 데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은 딱히 중립적이지 않았다. 의원 가운데 거의 4분의 1은 회사 주식을 보유했는데, 정부가 디와니를 소유했다면 주가는 곤두박질쳤을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회사를 외국과의 경쟁에서 보호하는 것이 영국 외교 정책의 주요 목표가되었다.

그림에서 묘사된 거래는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기업이란 게 그렇듯이 당시에도 영국 동인도회사는 오로지 주주들에게만 책임이 있었다. 벵골 지방에 대한 공정한 통치나 장기적 복지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았으므로 회사의 지배는 단순명료한 수탈과 서방으로 부를 신속하게 유출하는 것으로 탈바꿈했다.

얼마 안 있어 이미 전쟁으로 피폐해진 벵골주에는 1769년에 기근이 닥쳤고 상황은 과중한 세금으로 악화했다. 회사의 징세인들은 당시에 ‘돈나무 흔들기 shaking of the pagoda tree’ (‘pagoda tree’는 회화나무나 벵골보리수나무처럼 탑 모양으로 자라는 나무를 통칭하며 돈나무라고도 한다. 돈나무 흔들기는 손쉽게 떼돈을 번다, 벼락부자가 된다는 의미의 관용적 표현이다—옮긴이)라고 부른 짓—오늘날에는 세금 징수 과정에서 자행되는 중대한 인권 침해라고 부를 만한 행위—을 저질렀다. 벵골의 부는 급속히 영국으로 유출된 반면, 그곳에서 번영하던 직조공과 장인은 새로운 주인에게 ‘수많은 노예’처럼 부려졌다.

벵골에서 약탈한 부의 상당량은 클라이브의 주머니로 곧장 들어갔다. 그는 당시 가치로 23만 4,000파운드에 달하는 재산을 챙겨 영국으로 돌아와 유럽 최대의 자수성가 갑부가 되었다. 1757년 플라시 전투―군사적 재능만큼이나 기만과 계약서 위조, 은행가들과 뇌물 덕분에 얻은 승리―이후로 그는 패전한 벵골의 군주들에게서 재산을 몰수하여 회사 금고에 무려 250만 파운드 •를 이전했는데, 당시 전대미문의 액수였다. 여기에 무슨 대단한 간계는 필요하지 않았다. 벵골 국고에 수장된 보화 전체가 그냥 100척의 보트에 실려 갠지스강을 따라 운반되어, 무르시다바드에 있는 벵골 나와브의 궁전에서 회사의 캘커타 본부인 윌리엄 요새 Fort William에 도착했다. 여기서 나온 돈의 일부는 나중에 파위스 성을 재건하는 데 들어갔다.

• 현재 가치로 2억 6,250만 파운드 (저자는 당시와 현재의 물가를 기준으로 단순 환산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 규모의 차이까지 고려하면 당시의 100만 파운드는 수백억 파운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옮긴이).

파위스에 걸려 있는 클라이브와 샤 알람의 그림은 살짝 기만적이다. 화가인 벤저민 웨스트 Benjamin West는 인도에 간 적이 없다. 당시에도 한 평자는 원경의 모스크가 “우리의 유서 깊은 세인트 폴 성당의 돔”과 의심스러울 만큼 닮았다고 지적했다. 사실 그때 거창한 공식 의례는 없었다. 징세권 이전은 얼마 전 함락된 무굴 알라 하바드 요새의 연병장에 황급히 차려진 클라이브의 막사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졌다. 그림 속 샤 알람의 비단 옥좌는 사실 수여식을 위해서 클라이브의 안락의자를 식탁 위에 올린 다음 친츠 chintz (흔히 자잘한 꽃무늬가 날염된 광택이 나는 면직물—옮긴이) 침대보로 덮어 급조한 것이었다.

나중에 영국은 알라하바드 조약이라고 부르면서 그 문서에 위엄과 그럴듯한 지위를 부여했지만, 클라이브가 모든 합의 조건을 결정했고 겁에 질린 샤 알람은 그저 동의했을 뿐이다. 당대 무굴의 역사가 굴람 후사인 칸이 다음과 같이 표현한 대로였다. “현명한 대사와 유능한 협상가 들을 파견하고 신료들과 오랜 토론과 논쟁이 필요했을 그렇게 엄중한 사안이 수탕나귀나 역축, 소 한 마리를 팔 때 걸릴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에 매듭지어졌다.” 3

오래잖아 동인도회사는 전 세계를 주름잡았다. 회사는 로마 시대부터 줄곧 서양에서 동양으로 정금 正金의 지속적인 유출을 초래한 무역수지를 거의 혼자 힘으로 뒤집었다. 동인도회사는 중국으로 아편을 실어 날랐고, 결국에는 홍콩에 역외기지를 얻어내고 고수익의 마약 독점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아편전쟁을 벌였다 (동인도회사의 중국 무역 독점은 이미 1833년에 폐지되어 다양한 회사들이 아편 무역에 뛰어들었다. 1839년에 발발한 아편전쟁은 협소하게 동인도회사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제한적인 광둥 무역 체제를 깨트리고 중국에 영국식 자유무역 체제를 강요하려는 의도가 컸다―옮긴이).

회사는 서쪽으로는 중국산 차를 매사추세츠로 실어 날랐는데, 그곳 보스턴 항구에서 차 상자가 투척된 사건은 미국 독립전쟁을 불러 왔다. 실제로 독립전쟁 전야에 아메리카 애국파 Patriots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 가운데 독립을 지향하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이름. 반대로 본국 정부에 충성하는 사람들은 ‘충성파 Loyalists’라고 불렸다―옮긴이)는 인도에서처럼 본국 의회가 아메리카 대륙에 동인도회사를 들여와 이곳을 실컷 약탈하게 만들 것이라며 두려워했다. 1773년 11월에 애국파 존 디킨슨 John Dickenson은 동인도회사의 차를 “가증스러운 쓰레기”라고 부르며 장차 동인도회사가 아메리카에 집권할 가능성을 “쥐 떼에 잡아 먹히는 것”에 비유했다. 그는 이 “거의 파탄 난 회사”가 벵골에서 “유례없는 만행과 착취, 독점”을 자행하더니 이제는 “강탈과 압제, 잔인성의 재능을 발휘할 새로운 무대로 아메리카에 눈을 돌리고 있다”며 성토했다. 4

1803년, 회사는 무굴의 수도 델리를 함락하고 폐허가 된 왕궁 한가운데 눈이 먼 채로 앉아 있던 군주 샤 알람을 사로잡았다. 이때쯤 회사는 대략 20만 명의 사설 치안 병력―영국 육군의 두 배 규모―을 육성했고, 아시아의 어느 국민국가보다 더 많은 화력을 보유했다.

유럽 가장자리 외딴 섬나라에서 온 소수의 사업가가 이제 서쪽의 델리부터 북인도를 가로질러 동쪽의 아삼까지 전 영역을 지배했다. 아대륙의 동해안 거의 전체가 회사의 수중에 있었고 구자라트부터 코모린곶 (칸야쿠마리)까지 서해안의 전략 요충지도 대부분 회사 소유였다. 지방의 군소 나와브와 총독조차 유럽의 대국보다 더 넓고 더 인구가 많은 지역을 다스리던 광대한 제국을 승계하며, 그들은 불과 40년 만에 인구가 5,000만에서 6,000만에 달하는 아대륙 거의 전부의 주인이 되었다.

어느 이사가 시인한 대로 동인도회사는 동방의 어느 나라와도 전쟁을 하거나 화평을 맺을 권한을 보유한 ‘제국 안의 제국’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회사는 방대하고 정교한 행정과 공무원 조직을 구축하고 런던 항만구역의 상당 부분을 건설했으며, 영국 무역의 절반 가까이를 담당했다. 동인도회사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원대한 상인회’를 자처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더 최근에 등장한 초거대기업처럼 동인도회사도 엄청나게 막강한 동시에 경제적 불확실성에 묘하게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벵골의 막대한 국부를 차지하고 징세권을 확보하여 회사의 주가가 하룻밤 새 두 배로 뛰었던 때 이후 고작 7년이 지나, 벵골의 약탈과 기근으로 토지 세입 전망치가 크게 줄어들자 거품이 꺼졌다. 동인도회사는 150만 파운드의 부채와 100만 파운드 •의 체납 청구서를 떠안았다. 이 사실이 알려졌을 때 유럽 전역에서 30개 은행이 연쇄적으로 파산하고 무역이 중단되었다.

• 현재 가치로 각각 1억 5,750만 파운드와 1억 500만 파운드.

결국 이 기업은 오늘날 우리에게 섬뜩할 만큼 친숙한 장면을 연출해가며, 모든 것을 실토하고 정부에 대규모 구제 금융을 요청해야만 했다. 1772년 7월 15일에 동인도회사의 이사들은 영란은행 Bank of England에 40만 파운드의 대출을 요청했다. 2주 뒤에 그들은 또다시 찾아와 추가로 30만 파운드를 요청했다. 영란은행은 20만 파운드밖에 마련할 수 없었다. • 8월에 이르자 이사들은 사실은 무려 100만 파운드라는 초유의 추가 자금이 필요하다고 정부에 넌지시 이야기했다. 이듬해 에드먼드 버크 Edmund Burke가 작성한 공식 보고서는 동인도회사의 재정 문제가 잠재적으로 “목에 걸린 맷돌처럼 [정부를] 헤아릴 수 없는 나락으로 끌고 내려갈 수 있다”라고 내다봤다. “이 저주받을 회사는 결국엔 독사처럼, 자신을 품 안에서 키워준 나라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 현재 가치로는 40만 파운드=4,200만 파운드, 30만 파운드=3,150만 파운드, 20만 파운 드=2,100만 파운드.

하지만 동인도회사는 정말이지 너무 커서 망할 수가 없는 회사였다. 이듬해인 1773년에 세계 최초의 침략적인 다국적 기업은 역사상 최초의 구제 금융으로 살아났다. 국가가 망해가는 기업을 살려주는 대가로 회사를 규제하고 경영을 엄격하게 통제할 권한을 받아낸 최초 사례였다.

이 책의 목표는 동인도회사의 전사 全史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며, 이 회사의 경영을 경제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대신 이 책은 런던의 사무실 단지에 본사를 둔 한 기업이 1756년과 1803년 사이에 어떻게 광대한 아대륙의 주인으로서 강대한 무굴 제국을 대체했을까라는 질문에 대답해보고자 했다.

그것은 회사가 어떻게 주요 경쟁자들―벵골과 아와드의 나와브, 티푸 술탄의 마이소르 왕국, 대 大마라타연맹―을 물리치고 샤 알람 황제를 자신들의 비호 아래 두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샤 알람, 그는 인도를 침략하여 일개 무역 회사에서 어엿한 제국적 세력으로 대두하는 50년에 걸친 회사의 이야기 전체를 지켜볼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샤 알람의 일생은 이하에 나올 서사의 뼈대를 이룬다.

앞 세대 역사가들의 연구와 달리, 18세기는 인도의 ‘암흑기’가 아니었다는 것이 지금은 일반적인 견해다. 오히려 무굴 제국의 정치적 쇠퇴가 아대륙 다른 지역들의 경제 부흥을 가져왔다는 인식을 심화시키는 연구가 많이 나왔다. 5 하지만 지역 부흥에 관한 탁월한 연구들이 18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분명히 무굴 심장부, 특히 델리와 아그라 주변 지역의 붕괴를 초래한 무정부 상태의 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파키르 카이르 우드딘 일라하바디 Fakir Khair ud-Din Illahabadi가 표현한 대로 “무질서와 타락은 더는 모습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한때 평화로웠던 인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사이 무굴 군주정은 실체가 사라졌고 그저 이름뿐이거나 희미한 그림자만 남게 되었다”. 6

무정부라는 진단은 파키르 카이르 우드딘과 굴람 후사인 칸과 같이 비탄에 빠진 몇몇 무굴 귀족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여행객들이 한결같이 기록한 현상임을 고려할 때, 나는 수정주의 역사 서술은 너무 나간 것이라 생각한다. 로와 모다브부터 폴리에르와 프랭클린에 이르기까지 18세기 후반 인도를 직접 체험한 거의 모든 목격자들은 거듭하여 그 시기의 끝없는 유혈과 혼란, 그리고 중무장한 호위대 없이는 대부분의 지역을 무사히 이동할 수 없는 어려움에 관해 언급한다. 거대한 무정부 상태 Great Anarchy란 개념을 처음 통용시킨 이들은 바로 이런 목격자 들이었다.

특히 1750년대와 1770년대 사이에 회사가 치른 많은 전쟁과 벵골, 비하르, 오리사주 약탈은 이러한 혼란상을 더했고 델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들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의 원제를 《무정부 Anarchy》라고 지은 것은 그래서이다. 파란만장하고 혼란스럽고 폭력으로 점철된 이 시기의 군사사 史와, 리처드 바넷 Richard Barnett과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 옛 스승이기도 한 크리스토퍼 베일리 Christopher Bayly가 힘써 조명해온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의 장기적인 확립 사이에 까다로운 균형을 분명히 잡아야 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상이한 층위의 행위와 분석을 일치시킬 방법을 찾아낸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그런 불가능한 과제를 해결해보려 는 시도다.

이 책은 주로 수천, 수만 장에 달하는 회사의 방대한 기록을 토대로 한다. 본사에서 나온 문서와 인도 주재 직원이 레든홀가의 이사진에게 보낸 공문은 이제 런던 영국도서관의 문서고에 들어차 있다. 총독 관저와 캘커타 윌리엄 요새에 위치한 회사의 인도 본부에서 나온 흔히 더 자세하고 흥미로운 기록은 이제 뉴델리 인도 국립문서고 National Archives of India: NAI에서 찾을 수 있으며, 내가 조사를 집중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NAI에 소장된 18세기 기록은 잘 정리된 그곳의 19세기 문서보다 파악하기가 훨씬 어렵다. 나는 처음 몇 주 동안은 색인 목록을 찾는 데만도 애를 먹었는데, 뛰어나고 항상 인내심을 잃지 않는 NAI의 자야 라빈드란과 아누미타 바네르지 덕분에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골방과 창고를 샅샅이 뒤진 끝에 목록을 찾아냈다. 성공의 보답은 엄청났다. 몇 주 만에 나는 회사로 하여금 로저 드레이크 Roger Drake총독에게 캘커타 성벽 재건을 지시하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시라지 우드다울라의 공격 행위를 유발해 개전 사유가 된 로리앙항 Port Lorient에서 나온 첩보 원문과 클라이브가 플라시 전장에서 보낸 최초 공문을 손에 쥐었다.

이러한 회사의 영어 기록과 더불어 교양 넘치는 무굴 역사가, 귀족,문시 munshi, 서기 들이 18세기에 걸쳐 내놓은 탁월한 페르시아어 역사서도 이용했다. 이 가운데 최고인 《세이르 무타케린 Seir Mutaqherin》, 다시 말해 명석한 젊은 무굴 역사가 굴람 후사인 칸이 쓴 《당대 비평》은 그 시대에 대한 가장 예리한 시각이 돋보이는 인도 문헌이며, 1790년대 이래로 영어로도 구할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당대 비평》만큼 알려주는 것이 많은 다른 페르시아어 역사서 다수는 여전히 번역되지도 출판되지도 않았다.

이런 문헌은 나의 오랜 협업자 브루스 워널 Bruce Wannell의 도움을 받아 광범위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가 메라울리에 있는 내 염소 농장 정원에 텐트를 치고 머물면서 파키르 카이르 우드딘 일라하바디의 《이브라트 나마 Ibrat Nama》 (훈계서)나 파니파트의 무하마드 알리 칸 안사리 Mohammad Ail Khan Ansari가 쓴 《타리크이 무자파리 Tarikh-i Muzaffari》같이 잘 알려지지 않은 문헌을 가지고 여러 달에 걸쳐 내놓은 뛰어난 번역은 이 프로젝트를 완전히 바꿔놓았으며, 18세기 인도와 더 넓은 이슬람 세계에 대한 비할 데 없는 그의 지식도 마찬가지다. 그가 라자스탄, 통크의 마프리 연구소 MAAPRI Reserch Insititute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 전에 이용된 적 없는 샤 알람 전기인 문시 문나 랄 Munshi Munna Lal의 《샤 알람 나마 Shah Alam Nama》를 번역하고, 퐁디셰리 (푸두체리)에서 장 들로슈와 여러 차례 토론을 통해, 장티, 마데크, 로의 회고록과 모다브 백작 Comte de Modave의 훌륭한 《여행기 Voyages》와 같이 번역된 적 없고 거의 이용되지 않은18세기 프랑스 문헌 다수를 흠잡을 데 없이 영어로 옮겨준 것에 특히 감사하다. 특히 그르노블 시절 볼테르의 세련된 이웃이자 친구였던 모다브 백작은 회사 지배 시기 캘커타의 드넓은 대로부터 퇴락해가는 샤 알람의 수도 델리의 폐허에 이르기까지 18세기 풍경에 세련되고 풍자적이며 날카로운 시선을 던져준다.

지난 6년간 동인도회사에 관해 작업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빚을 졌다. 우선 내가 인도 국립문서고에서 파헤친 필사본들을 타자로 치며 여러 달 동안 수고한 릴리 텍셍과 단정한 필기체로 적힌 회사의 공식 기록 및 클라이브, 헤이스팅스, 콘월리스, 웰즐리의 개인 서신을 붙들고 씨름하며 런던에서 유사한 과제를 수행해준 나의 인척 케이티 로원과 하르파반 만쿠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샤 알람의 자작시를 아름답게 번역해준 알리야 나크비와 캐서린 버틀러 스코필드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많은 친구들이 이 책의 여러 초고를 읽어주었는데 특히 피터 마셜, 라자트 다타, 로버트 트래버스, 나자프 하이데르, 락슈미 수브라 마니안, 장마리 라퐁, 노니카 다타, 소날 싱, 비자이 핀치, 마무드 파루퀴, 야샤슈위니 찬드라, 나라야니 바수, 스코필드, 말라싱, 로리 프레이저, 샘 밀러, 잔니 두비니, 제러미 파킨슨, 리야 사르카르, 치키 사르카르, 자얀타 셍굽타, 애덤 달림플, 난디니 메타에게 감사드린다.

다른 많은 이들도 귀중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B. N. 고스와미, 에바 코흐, 모민 라티프, 존 프리츠, 조지 미셸, 샤시 타루르, 찬데르 셰카르, 자그디시 미탈, 다이애나 로즈 하오비잠, 나브테지 사르나, 타냐 쿠루빌라, S. 가우탐, 타냐 바논과 바샤라트 피어에게 감사드리며, 특히 인도 최고의 여행사인 반얀의 루시 데이비슨에게 감사드린다. 데이비슨은 카르나티크 해안을 따라 스리랑가파트남과 통크까지, 데칸을 거쳐 푸네까지 그리고 어쩌면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캘커타와 무르시다바드까지 여러 차례 답사 여행을 솜씨 좋게 조직해줬다.

파키스탄에서는 파키르 아이자주딘, 알리 세티, 후사인과 알리야나크비 그리고 페르시아어와 우르두어 문헌에 접근할 수 있게 너그러이 도움을 준 펀자브 문서고의 아바스에게 감사드린다.

미국에서는 무자파르 알람, 마야 재서노프, 아예샤 잘랄, 벤 홉킨스, 나일 그린, 산자이 수브라마니암, 두르바 고시, 엘브룬 키멜만, 나비나 하이다르에게 감사드린다.

영국에서는 닉 로빈스, 사키브 바부리, 어슐러 심스윌리엄스, 존 윌슨, 말리니 로이, 제리 로스티, 존 팰코너, 앤드루 탑스필드, 린다 콜리, 데이비드 캐너다인, 수전 스트런지, 아민 재퍼, 아니타 아난드, 이안 트루거, 로버트 맥팔레인, 마이클 액스워디, 데이비드 길모어, 로리 스튜어트, 찰스 앨런, 존 키, 토미 와이드, 모니샤 라제시, 아라티 프라사드, 파루크 후사인, 찰스 그리그, 로지 루엘린존스, 리처드 블러턴, 앤 버들, 샘 머피, 헨리 놀티, 로버트 스켈턴, 프란체스카 갤러웨이, 샘 밀러, 시린 바킬, 자리어 마사니, 티르산카르 로이, 브리지드 워덤스, 바너비와 로즈 로저슨, 앤서니와 실비 새틴, 휴, 족, 롭 달림플, 그리고 이제는 고인이 된 그리운 크리스 베일리에게 감사드린다. 30년도 더 전에 케임브리지에서 들은 크리스의 강의는 18세기 인도의 복잡다단함에 관한 나의 흥미를 처음 일깨웠다.

나는 둘도 없는 에이전트 데이비드 고드윈과 블룸스버리 출판사의 뛰어난 직원들인 알렉산드라 프링글, 트람안 도안, 릴리드 켄드릭, 에마 볼, 리처드 차킨, 요게시 샤르마, 미낙시 싱, 파이자 칸, 벤 하이먼 그리고 특히 30년 넘게 나의 편집자인 마이크 피시윅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 뷔셰 샤스텔 출판사의 베라 미칼스키와 이탈리아 아델피 출판사의 로베르토 칼라소에게도 감사드린다.

사랑하는 가족 올리비아, 아이비, 샘, 애덤은 이 책이 나올 때까지 6년의 긴 세월 동안 내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 해줬다. 올리브는 특히 정서적으로 나를 지탱해준 반석이자 이 프로젝트를 배후에서 이끈 진정한 힘이며, 나의 첫 번째이자 최고의 편집자인 동시에 변함없는 인내심과 관대함, 사랑을 베풀어주는 인생의 동반자다. 그들과 이 책을 집필하는 사이에 돌아가신 부모님께 나는 누구에게보다 큰 빚을 졌다. 아버지는 특히 내가 이 책을 완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리라 믿으셨는데 정말로 탈고까지 아직 두 장이 남아 있던 크리스마스 이튿날 돌아가셔서 끝내 완결을 보지 못하셨다. 하지만 역사를 사랑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내게 가르쳐주신 분은 아버지다. 이 책을 아버지 영전에 바친다

윌리엄 달림플

노스 버윅-치즈윅-메라울리,

2013년 3월~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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