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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로 같은 공기는 서쪽 타소스 산 너머로 해가 기울면서 조금은 누그러졌다. 산자락에 늘어선 나무들이 드리운 기다란 그림자가 점점 내려와 브래디 비행장의 해안 가장자리를 덮을 즈음, 피트는 정문을 통과했다. 그는 바깥 도로에서 걸음을 멈추고 순수한 지중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폐 속이 짜릿하게 저려오는 감각을 즐기며. 담배를 찾는 습관적인 충동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는 억누르고 다시 숨을 들이마시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굽이치는 파도 너머, 저무는 태양은 ‘퍼스트 어템프트’를 황금빛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시야는 유리처럼 맑아, 이 마일 밖의 배 위 세세한 부분까지도 눈에 들어왔다. 피트는 꼼짝 않고 거의 두 분 동안 그 광경에 매료된 채 서 있었다. 그러다 약속한 차를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차는 이미 와 있었다. 도로 한쪽에 정박한 호화 요트처럼 당당히 앉아 있었다.
“빌어먹을…” 피트는 중얼거리며 차를 보았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의 얼굴엔 고급 자동차에 대한 찬탄이 드러났다.
그것은 마이바흐-체펠린 타운카였다.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엔 유리 칸막이가 있었고, 운전석은 노출된 채 태양 아래 드러나 있었다. 커다란 더블-M 장식이 라디에이터 위에 박혀 있었고, 보닛은 2미터 가까이 길게 뻗어 낮은 이중 유리창에서 끝났다. 전체가 거대한 괴력의 상징처럼 보였다. 길게 뻗은 펜더와 발판은 검게 빛났고, 차체는 깊고 두터운 은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독일 기술의 정수, 모든 부품과 나사, 볼트 하나하나에 완벽함이 담겨 있었다. 1936년 롤스로이스 팬텀 III가 영국의 이상을 대변했다면, 그 독일판 대답은 바로 1936년 마이바흐 체펠린이었다.
피트는 차 곁에 서서 앞 펜더에 박힌 거대한 예비 타이어를 쓸어보았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깊은 홈이 패인 트레드를 보고는 만족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커다란 도넛 같은 타이어를 몇 번 두드리고는 시선을 운전석으로 옮겼다.
운전사는 핸들 뒤에 몸을 기대고 문틀에 손가락을 두드리며 심드렁하게 앉아 있었다. 심지어 하품까지 하며 지루함을 드러냈다. 그의 차림새는 제2차 세계대전 나치 장교 복장을 떠올리게 하는 회녹색 튜닉이었으나, 소매와 어깨에는 계급장은 없었다. 챙이 높은 모자가 머리를 덮고 있었고, 옆머리 사이로 드러난 금발이 살짝 보였다. 옛날식 은테 안경이 그의 눈을 가렸고, 입가에는 길고 가느다란 담배가 매달려 있었다. 교만과 거만함이 뒤섞인 태도였다. 숨길 의도조차 없는 듯.
피트는 순간적으로 그에게 반감을 느꼈다. 발판 위에 발을 올리고 운전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를 기다리는 것 같군. 내 이름은 피트요.”
운전사는 피트를 쳐다보지도 않고, 담배를 그의 어깨 너머 길바닥에 휙 던졌다. 그러고는 시동을 걸며 굵은 독일 억양으로 말했다.
“당신이 미군의 쓰레기 수거인이라면, 타시지.”
피트의 눈이 차갑게 빛나며 웃음을 지었다.
“앞좌석에서 악취 풍기는 천민들과 함께 앉을까, 아니면 뒷좌석에서 귀족 대접을 받을까?”
“어디든 당신 마음대로.” 운전사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지만 끝내 시선을 피트에게 주지 않았다.
“고맙군.” 피트는 매끈하게 받아쳤다. “그럼 뒷좌석을 택하지.”
그는 크롬 손잡이를 내려 금고 같은 문을 열고 안으로 올라탔다. 칸막이 창 위엔 낡은 롤식 커튼이 걸려 있었고, 피트는 그것을 내려 앞좌석 시야를 가렸다. 부드럽고 호화로운 모로코 가죽 좌석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붙이며 타소스를 가로지르는 초저녁 드라이브를 즐길 준비를 했다.
마이바흐의 엔진은 조용히 살아났고, 운전사는 기어를 속삭이듯 바꾸며 거대한 차를 리미나스로 향하게 몰았다.
피트는 창문을 내리고 산기슭을 덮은 전나무와 밤나무,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올리브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담배밭과 밀밭이 끼어 있었는데, 그것은 피트가 미 남부 상공을 비행하며 보던 작은 농가들을 떠올리게 했다.
곧 차는 그림 같은 파나기아 마을을 지나갔다. 고풍스러운 자갈길에 남은 물웅덩이를 튀기며. 집들은 대부분 하얗게 칠해져 여름 햇살을 반사했고, 지붕은 서로 기울어 좁은 골목 위에서 거의 맞닿았다. 몇 분 지나자 마을은 뒤로 사라지고 리미나스가 나타났다. 그러나 차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도시를 우회하더니, 절벽길을 따라 산으로 치고 올랐다. 처음엔 완만했으나 곧 급경사의 헤어핀 커브가 이어졌다.
마이바흐는 산길과는 어울리지 않는 괴물이었고, 운전사는 고생스레 핸들을 꺾었다. 차는 원래 베를린 린덴 거리를 달리라고 만든 것이지 노새길을 돌파하라고 만든 건 아니었다. 피트는 바다 쪽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반대편에서 다른 차라도 나타나면 어찌 될까 생각했다.
마침내 그는 그것을 보았다. 어둑해진 절벽 위로 솟은 거대한 하얀 사각형. 곡선길이 끝나고 다이아몬드 무늬 트레드가 단단한 차도 위로 올라섰다.
피트는 충분히 감탄했다. 그 빌라는 규모만으로도 로마 포럼에 맞먹을 만큼 웅장했다. 정원은 잘 가꾸어져 있었고, 부유함과 세련된 기품이 넘쳤다. 저택은 두 산봉우리 사이 골짜기에 자리 잡아 에게 해의 탁 트인 전경을 굽어보고 있었다. 높은 담장의 대문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용히 열렸고, 운전사는 전나무로 정돈된 길을 따라가 대리석 계단 앞에서 차를 멈췄다. 계단 중앙에는 아이를 안은 고대풍의 여인상이 묵묵히 피트를 맞이했다.
피트는 계단을 오르다 말고 다시 차로 돌아갔다.
“운전수, 미안하지만 이름을 못 들었군.”
운전수는 당혹스레 올려다보았다.
“내 이름은 빌리요. 왜 묻소?”
“빌리, 친구.” 피트가 진지하게 말했다.
“한 가지 말해둘 게 있네. 잠시 차에서 내려줄 수 있겠나?”
빌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차에서 내려 피트와 마주 섰다.
“이제, 헤르 피트, 무슨 얘길 하고 싶소?”
“자네가 징박은 군화를 신었군, 빌리.”
“야, 난 잭부츠를 신었지.”
피트는 중고차 딜러 같은 미소를 번쩍였다.
“그리고 잭부츠에는 징이 박혀 있지 않나?”
“야, 잭부츠에는 징이 있지.” 빌리가 성가신 듯 말했다.
“이런 쓸데없는 걸 왜 묻는 거요? 난 할 일이 많소.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피트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친구, 훔쳐보기 배지를 따려면 충고 하나 해두지. 은테 안경은 햇빛을 반사해서 은신처를 쉽게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말이야.”
빌리의 얼굴은 멍해졌다.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피트의 주먹이 그의 입을 강타했다. 말은 뚝 끊겼다. 충격에 빌리의 머리가 젖혀지며 모자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의 눈은 흐려지고 멍해졌고, 나뭇잎 떨어지듯 천천히 무릎 꿇더니 멍하니 주저앉았다. 부러진 코에서 피 섞인 점액이 흘러 회녹색 제복의 앞자락을 물들였다. 피트는 그것이 묘하게도 예술적인 효과를 준다고 생각했다. 곧 빌리는 대리석 계단에 앞으로 쓰러지며 움직이지 않았다.
피트는 멍든 손가락 마디를 문지르며 싸늘한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세 계단씩 뛰어 올라가며 달렸다. 꼭대기에 도착하자 그는 돌 아치문을 지나 원형 안뜰에 들어섰다. 중앙엔 수면처럼 맑은 연못이 자리 잡고 있었고, 둘레에는 20구가 넘는 장대한 로마 병사 석상이 서 있었다. 눈 먼 돌의 시선은 물 위에 비친 하얀 형상만 뚫어지게 응시하며, 잊힌 승전과 영광의 전쟁을 회상하는 듯했다. 어둑한 그림자가 각 병사 위에 망토처럼 드리워져, 피트는 당장이라도 돌병사들이 살아 움직여 빌라를 공격할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피트는 연못을 돌아 반대편의 커다란 이중문 앞에 섰다. 사자의 머리 모양 청동 노커가 괴이하게 매달려 있었다. 피트는 그것을 들어 올려 세게 두드렸다. 그러곤 다시 안뜰을 바라보았다. 전체 분위기는 마치 영묘 같았다. 꽃다발 몇 개와 오르간 소리만 더하면 딱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피트는 문턱 너머를 들여다봤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망설임이 1분, 2분으로 길어졌다. 마침내 숨바꼭질에 지친 그는 어깨를 펴고 주먹을 움켜쥔 채 화려하게 장식된 현관실로 발을 들였다.
벽마다 고대 전투 장면을 수놓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자수로 된 군대는 전투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행진하고 있었다. 돔 천장이 방을 덮고 있었고, 아치 꼭대기에서 부드러운 노란빛이 흘러내렸다. 피트는 주위를 둘러보고 혼자임을 확인하자 방 중앙에 놓인 대리석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시간이 흘렀고, 그는 헛되이 재떨이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아무 예고도 없이, 태피스트리 하나가 젖혀지며 노인이 거대한 흰 개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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