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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는 약간 넋이 나간 듯, 거대한 저먼 셰퍼드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개의 주인인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웃음기 없는 사악한 표정은 마치 늦은 밤 TV에서 보던 구식 영화 속 악역처럼, 전형적인 둥근 독일인 얼굴에 박혀 있었다. 삭발한 두피, 흔들리는 눈빛, 목 없는 체구. 꽉 다문 얇은 입술은 변비 환자처럼 보였다. 몸매 역시 악역의 전형을 닮아, 단단히 다져진 육체에 군살 하나 없었다. 채찍과 광택 나는 장화만 있으면 완벽했다. 순간 피트는 ‘사람들이 미워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나이,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이 되살아나서 <그리드>의 한 장면을 연출하려 서 있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좋은 저녁일세.” 노인은 의심스러운, 목구멍 깊은 발음으로 말했다. “자네가 내 조카딸이 저녁 식사에 초대한 신사인가?”
피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눈은 거대한 개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
“그렇습니다. 메이저 더크 피트, 당신의 서비스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노인의 팽팽한 두피 아래 이마가 놀람으로 접혔다.
“내 조카가 내게 말하길, 자네는 병장 계급에도 못 미치고, 직업은 쓰레기 수거라고 했는데.”
“내 미국식 유머를 용서하시지요.” 피트가 상대의 혼란을 즐기며 말했다.
“작은 장난이 불편을 드린 건 아니길 바랍니다.”
“아니, 약간 걱정은 되었지만 불편은 아니었네.” 노인은 손을 내밀며 피트를 주의 깊게 살폈다.
“만나게 되어 영광일세, 메이저. 나는 브루노 폰 틸이네.”
피트는 내민 손을 움켜쥐고 시선을 맞받았다.
“영광은 제 쪽입니다, 선생.”
폰 틸은 태피스트리를 젖혀 문을 드러냈다.
“이쪽으로, 메이저. 테리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와 함께 술 한 잔 하세.”
피트는 평평한 체구의 노인과 흰 개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지나 웅장한 서재로 들어섰다. 천장은 9미터 이상 높이 솟아 있었고, 기둥이 받치고 있었다. 가구는 단출했으나 고전적인 품격이 방안에 흐르고 있었다. 수레에는 기묘한 그리스식 안주가 차려져 있었고, 벽의 움푹 들어간 곳에는 완벽하게 갖춘 바가 있었다. 단 하나 이질적으로 보이는 장식품은, 바 위 선반 위에 올려진 독일 잠수함 모형이었다.
폰 틸은 피트에게 자리를 권했다.
“무엇을 드시겠나, 메이저?”
“스카치에 얼음을 부탁합니다.” 피트는 팔걸이 없는 소파에 기대며 말했다.
“당신의 빌라는 참으로 인상적이군요. 분명 흥미로운 역사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원래는 기원전 138년 로마인들이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에게 바친 신전이었네. 나는 1차 대전 직후 폐허를 사들여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했지.” 그는 잔을 내밀었다.
“건배하지.”
“누구 혹은 무엇에게 건배할까요?”
폰 틸이 미소 지었다.
“자네가 정하세. 미녀에게… 부에… 장수에… 아니면 자네 나라 대통령에게도 좋고. 선택은 자네 몫이야.”
피트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렇다면, 나는 ‘마케도니아의 매’라 불린 쿠르트 하이베르트의 용기와 비행술에 건배를 제안합니다.”
폰 틸의 얼굴은 텅 빈 듯 굳어졌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대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특이한 사람이군, 메이저. 쓰레기 수거인 행세를 하고… 내 빌라에 와서는 내 운전수를 두들겨 패고… 그러더니 내 오랜 전우 쿠르트에게 건배를 올리다니.” 그는 음흉한 미소를 피트에게 던졌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내 조카딸을 유혹한 일보다 더 뛰어난 업적은 없네. 그 덕분에 나는 자네를 축하하고 또 감사하지. 아홉 해 만에 처음으로 테리가 노래하며 웃는 걸 보았거든. 자네의 방탕한 짓을 묵인할 수밖에 없군.”
이번엔 피트가 놀랄 차례였지만, 대신 고개를 젖히며 웃어버렸다.
“모든 점에 사과드리죠. 단, 당신의 변태 같은 운전수에게 주먹을 날린 건 제외입니다. 그건 자업자득이니까.”
“가엾은 빌리를 탓하지 말게. 그는 단지 내 명령을 따른 것일 뿐이야. 나는 테리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지. 그녀는 내 유일한 혈육이네.”
“대체 무슨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겁니까?”
폰 틸은 창가로 걸어가, 어두워져 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반세기 넘게 난 큰 조직을 세웠네. 그 대가로 적도 여럿 만들었지. 그들이 언제 복수를 꿈꿀지 알 수 없네.”
피트의 눈이 폰 틸을 꿰뚫었다.
“그래서 루거를 어깨에 차고 다니는 겁니까?”
폰 틸은 왼쪽 겨드랑이 아래 불룩 솟은 권총집 위로 흰 디너 재킷을 곤란한 듯 고쳐 입었다.
“어떻게 루거라는 걸 알았나?”
“그냥 짐작이죠.” 피트가 말했다.
“당신은 왠지 루거 타입으로 보였거든요.”
폰 틸은 어깨를 으쓱했다.
“보통은 그렇게 속물적으로 굴진 않네. 하지만 테리가 묘사한 자네 얘길 듣고, 의심할 이유는 충분했어.”
“인정합니다. 죄 지은 일 몇 번 있지요.” 피트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살인이나 공갈은 목록에 없습니다.”
폰 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마 자네도 내… 뭐라고 하던가, 신발을 신어 보았다면 그리 경박하게 굴진 않았을 게다.”
“폰 틸 씨의 신발은 점점 더 수수께끼군요.” 피트가 말했다.
“어떤 사업을 하십니까?”
폰 틸의 눈엔 의심이 스쳤지만, 입술은 가짜 미소로 굳어졌다.
“말해봤자 자네 입맛만 버릴 걸세. 그러면 테리가 화를 내겠지. 오늘 저녁 요리를 반나절이나 공들였으니까. 언젠가, 내가 자네를 더 잘 알게 되면 말하리다.”
피트는 잔 속 마지막 스카치를 휘저으며 자기가 어떤 소용돌이에 빠져든 건지 생각했다. 폰 틸은 정신 나간 괴짜이거나, 혹은 매우 영리한 기획자였다.
“한 잔 더 드릴까?” 폰 틸이 물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따르죠.” 피트는 잔을 비우고 바 쪽으로 걸어가 새 술을 따랐다. 그는 폰 틸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읽은 기록에 따르면, 1차 대전 당시 쿠르트 하이베르트의 죽음은 모호합니다. 독일 공식 기록에는 영국군에게 격추되어 에게 해에 추락했다고만 되어 있지, 격추한 조종사의 이름은 없지요. 시신을 찾았는지 여부도 빠져 있고요.”
폰 틸은 개를 쓰다듬으며 잠시 과거에 잠긴 듯 보였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쿠르트는 1918년, 영국과 자기만의 전쟁을 벌였지. 그는 침착하거나 효율적으로 싸우지 않았다네. 마치 경련 일으킨 악마에 씐 듯 기체를 몰아, 적 편대를 향해 미친 듯 달려들었어. 하늘 위에서 그는 욕을 내뱉고, 소리치고, 조종석 가장자리를 피가 나도록 두드렸다네. 이륙할 때면 언제나 엔진을 끝까지 몰아, 알바트로스를 겁먹은 새처럼 튀어 오르게 했어. 하지만 비행 임무에서 벗어나 전쟁을 잠시 잊을 때면, 놀라울 만큼 유머러스한 사람이기도 했지.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독일 군인과는 전혀 달랐네.”
피트는 고개를 저으며 옅게 웃었다.
“용서하시오, 폰 틸 씨. 하지만 내 전우들은 아직 웃음 많은 독일 군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대머리 노인은 피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진지했다.
“쿠르트의 최후는 영국군의 교묘한 속임수 때문이었네. 그들은 그의 전술을 연구한 끝에, 그가 관측 기구 공격에 집착한다는 약점을 간파했지. 그래서 낡은 기구 하나를 개조하고, 관측석에는 잡초로 채운 군복 인형을 앉혔네. 그리고 폭약을 연결해놓고 기다린 거야.” 폰 틸은 두툼한 소파에 앉으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그의 눈은 보이지 않는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1918년의 하늘을.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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