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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음모

지중해의 음모 #018

Escaper 2025. 8. 29.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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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1

가파른 비탈을 4분의 1마일쯤 내려가자 길은 도로로 변했다. 도로라기보다는 잡초 속에 난 두 줄의 타이어 자국에 불과했다. 그 바퀴 자국은 지그재그로 산을 내려가며 수많은 헤어핀 곡선을 만들었다. 피트는 반쯤 달리듯 비틀거리며 내려갔다. 심장은 고통스러운 압박 속에서 미친 듯이 뛰었다. 부상은 심각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많은 피를 잃었다. 그를 본 의사가 있었다면 당장 병원 침대에 눕혔을 것이다.

미로에서 탈출한 이래 피트의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한 장면이 되살아났다. 알바트로스에게 무방비로 기총 소사를 당하는 퍼스트 어템프트의 과학자들과 선원들의 모습이었다. 총탄이 살과 뼈를 갈기갈기 찢고, 하얀 선체에 붉은 얼룩이 번지는 장면이 눈앞에 선명했다. 브래디 비행장에서 신형 요격기들이 출격하기도 전에 전부 끝나버릴 것이었다. 물론 새 기체가 새벽 전에 북아프리카 보급기지에서 도착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이런 환영과 공포가 피트를 정상 이상의 힘으로 내몰았다.

갑자기 그는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그는 길에서 벗어나 밤나무 숲을 돌아 조심스레 접근했다. 넘어진 고목 뒤에서 고개를 내밀자, 희미한 빛 속에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잘 먹은 당나귀 한 마리가 바위에 묶여 있었다. 작은 짐승은 피트가 다가가자 귀를 한쪽 세우고 애처롭게 울었다.

“기수의 기도가 이런 놈은 아니겠지만,” 피트는 웃으며 말했다. “가릴 처지가 아니지.”

그는 밧줄을 풀어 즉석에서 코굴레를 만들었다. 한참 씨름 끝에 간신히 당나귀 코에 씌웠다. 그리고 올라탔다.

“좋아, 노새야, 출발하자.”

짐승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옆구리를 두드리고 발로 차고 흔들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귀를 눕히고 고집스럽게 버텼다.

피트는 생각했다. 아마 그리스 신이나 영웅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전진, 제우스! … 아폴로! … 포세이돈! … 헤라클레스! 아틀라스!”

당나귀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피트는 문득 떠올라 고개를 숙여 확인했다. 배 밑은 텅 비어 있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매혹적인 여신님.” 피트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랑스런 아프로디테여, 우리 떠납시다.”

당나귀가 귀를 한 번 씰룩였다. 피트는 감을 잡았다.

“아틀란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테나?”

귀가 쭉 올라갔다. 당나귀는 커다란 눈으로 피트를 바라봤다.

“좋아, 아테나, 출발!”

아테나는 발굽으로 땅을 두 번 긁더니 얌전히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새벽녘 공기는 서늘했고, 풀밭엔 이슬이 내려앉았다. 마침내 피트는 리미나스 외곽에 도착했다. 리미나스는 보통의 그리스 해안 마을이었다. 고대 도시의 유적 위에 세워진 근대적 건물들이 기와 지붕을 이고 늘어서 있었고, 곳곳에 옛 폐허가 남아 있었다. 바닷가에는 반달 모양의 항구가 휘어져 들어와, 평평한 목선들이 고래 떼처럼 누워 있었다. 흰 모래사장 뒤에는 비린내 나는 갈색 그물들이 긴 말뚝에 걸려 있었고, 그 뒤로는 작은 발코니가 딸린 하얀 집들이 달빛에 잠겨 있었다. 피트는 축 늘어진 몸으로 당나귀를 몰고 마을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에서 그는 당나귀를 우체통에 묶었다. 그리고 지갑에서 1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고삐에 끼워 넣었다.

“태워줘서 고맙다, 아테나. 잔돈은 네 거다.”

그는 당나귀의 코를 쓰다듬고, 해진 바지를 끌어올리며 바닷가로 걸어갔다.

전화를 찾으려 했지만 전선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리엔 차도 없었고, 자전거 한 대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쳐서 일곱 마일을 페달을 밟을 힘조차 없었다. 설령 전화나 차를 구해도, 그는 그리스어를 못했다.

오메가 시계의 바늘은 새벽 3시 59분. 새벽 해가 뜨려면 고작 41분 남았다. 그때까지 퍼스트 어템프트에 경고해야 했다. 육로로는 7마일이지만 바다를 가로지르면 4마일. 그는 배를 훔치기로 결심했다. 당나귀도 훔쳤는데 배쯤이야.

얼마 안 가 그는 단단한 선체를 가진 낡은 조각배를 발견했다. 녹슨 일기통 엔진이 달려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시동 장치를 더듬었다.

무거운 플라이휠을 돌리는 건 고역이었다. 그는 피가 나도록 크랭크를 돌렸다. 땀이 눈을 적시고 시야가 흐려졌다. 엔진은 가끔 기침하듯 터졌다가 꺼졌다. 그러나 끝내, 쇠약해진 근육의 마지막 힘을 짜내어 돌린 순간, 엔진이 숨을 몰아쉬다 마침내 불안정하게 살아났다.

피트는 힘이 빠져 오물투성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곧 칼로 밧줄을 끊고, 기어를 후진에 넣었다. 낡은 배는 항구를 빠져나와 고대 방파제를 돌아 바다로 나갔다.

그는 스로틀을 끝까지 밀어 붙였다. 배는 시속 7노트 남짓으로 파도를 헤치며 나아갔다. 그는 손바닥이 벗겨진 채로 키를 움켜쥐었다.

반 시간은 영겁처럼 흘렀다. 동쪽 하늘은 점점 밝아졌다. 그는 졸음에 고개를 떨어뜨리며도 계속 버텼다.

마침내, 다음 곶 너머에 회색 선체가 보였다. 선수와 선미의 32점등 두 개가 떠 있었다. 퍼스트 어템프트였다. 해가 떠오르며 갑판 구조물과 레이더 마스트가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더, 조금만 더.” 그는 엔진에 중얼거렸다. 그러나 삐걱대는 엔진은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해가 떠오르는 순간, 피트는 배를 뒤로 몰아 퍼스트 어템프트에 부딪쳤다.

“선박 위에! 도와줘!” 피트는 힘없이 외쳤다.

“멍청한 자식!” 위에서 성난 목소리가 내려왔다. “어디다 들이받는 거야? 다음엔 표적이라도 그려놔야겠군!”

피트는 웃음을 흘렸다. “농담은 집어치워. 어서 손 좀 써.”

“누군데?”

“피트다. 부상당했어. 장난 그만하고 내려와!”

“정말 메이저 피트요?”

“젠장, 출생증명서라도 보여줘야 하나?”

경계병은 허둥지둥 사라졌다 돌아왔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갈고리로 조각배를 잡아 끌었다. 그러나 발이 걸려 피트 위로 넘어졌다. 피트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노란 수염의 켄 나이트가 보였다.

“망할 자식,” 피트는 신음했다. “시간 낭비 말고 날 건 사령관실로 끌고 가.”

“세상에…” 켄 나이트는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나중에 설명하지.” 피트가 끊었다. “지금은 늦기 전에 날 움직여.”

나이트는 그를 반쯤 들쳐 업고 건으로 달려갔다. 건은 반바지 차림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안경 너머의 눈이 커졌다.

“세상에, 디르크! 무슨 일이야?”

피트는 피식 웃었다. “지옥에서 탈출해 온 낙오병이지.” 그는 낮게 말했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기상 장비 있나?”

건은 대답 대신 의무병을 불렀다. 그러나 피트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시간이 없어, 루디. 이 배는 곧 공격받는다. 브래디 비행장을 습격한 그 비행기에게.”

“헛소리군.” 건이 말했다.

“내 몸은 이 꼴이라도, 정신은 또렷해.” 피트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잘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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