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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피트는 선실 세면대 위 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수척하고 흉측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까만 머리칼이 얼굴과 귀로 늘어져 덥수룩하게 늘어진 왕관처럼 얹혀 있었고, 깊은 초록빛 눈은 붉게 터진 핏줄로 둘러싸여 있었다. 잠든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고작 네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를 깨운 건 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 밀려온 열기였다. 불덩이 같은 아침 공기가 살갗을 파고들며 그를 불쾌하게 뒤흔들었다. 닫혀 있던 통풍구를 열었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뜨거운 공기가 선실을 선점해 버렸고, 에어컨이 제 구실을 하기 시작하려면 이른 저녁은 되어야 했다. 피트는 수도꼭지를 틀고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물이 등과 어깨를 타고 흐르며 모공으로 스며들자 그제야 조금 시원해졌다.
그는 대충 몸을 닦고 머릿속에서 전날 일을 순서대로 떠올리려 했다. 윌리와 마이바흐 체플린, 저택, 폰 틸과의 술자리, 테리의 미모와 창백한 얼굴, 이어지는 미로와 개, 그리고 탈출. 아테나, 그녀의 주인은 당나귀를 찾았을까? 도리, 오늘 아침의 노란 알바트로스, 폭발. 이제 건과 그의 승조원이 추락한 비행기를 인양해 정체불명의 조종사의 시체를 찾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폰 틸과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그 노인의 속셈은 뭘까. 그리고 테리. 그녀는 덫을 알고 있었을까? 경고하려던 걸까? 아니면 삼촌에게 정보를 흘리도록 자신을 유인한 걸까?
피트는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들을 내던졌다. 붕대가 가려웠고, 벅벅 긁고 싶은 충동이 참을 수 없이 일었다. 더위는 숨이 막힐 정도였고, 차가운 술 한 잔이 간절했다. 의사가 몸에서 벗기지 않은 유일한 옷은 반바지였다. 그는 그것을 세면대에서 헹궈 입었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바싹 말라버렸다.
문에서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빨강 머리의 갑판 소년이 고개를 내밀었다.
“깨어 계십니까, 피트 소령님?” 소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간신히 말이오.” 피트가 대답했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소년이 머뭇거렸다. “의사 선생님께서 15분마다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편히 쉬고 계신지 말입니다.”
피트는 소년을 노려보았다. “이런 화덕 같은 데서 에어컨도 꺼져 있는데 누가 편히 쉬겠어?”
소년의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세상에, 죄송합니다. 전 건 함장님이 켜 두신 줄 알았습니다.”
“지나간 일이지.” 피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차라리 시원한 거 한 잔 가져다주게.”
“픽스 드실래요?”
피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라구?”
“픽스요. 그리스 맥주입니다.”
“좋지. 마셔 보지. 전에 ‘픽스한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마시는 건 처음이군.”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소령님. 깜빡했네요. 루이스 대령과 조르디노 대위께서 뵙길 원하십니다. 대령님은 곧장 들어오시려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막으셨습니다. 억지로 들어오면 배에서 내쫓아 버리겠다고요.”
“좋아, 들여보내게. 맥주는 서두르고.”
피트는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히고, 흐르는 땀이 시트에 스며드는 걸 느끼며 머릿속을 굴렸다. 지나간 일을 훑어 현재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했다.
루이스와 조르디노.
그들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아마 조르디노가 NUMA 본부에서 회신을 받았을 것이다. 퍼즐의 가장자리는 잡혔지만, 중심은 아직 뒤죽박죽이었다. 폰 틸의 사악한 얼굴이 미로 속에서 비웃고 있었다. 커다란 백색 개의 형상도 퍼즐 속에 억지로 끼워 넣으려 했으나, 맞지 않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 개가 폰 틸과 하이베르트 사이에 들어맞지 않는지.
갑자기 루이스가 소닉붐처럼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땀이 코를 타고 내려와 콧수염에 흡수되고 있었다.
“자, 소령. 어젯밤 내 저녁 초대를 거절한 게 후회되지 않나?”
피트는 희미하게 웃었다. “솔직히, 당신의 가리비 요리를 마다한 걸 후회한 순간이 몇 번 있긴 했소.” 그는 가슴에 엇갈리게 붙은 붕대를 가리켰다. “하지만, 다른 저녁 약속 덕분에 오래도록 기억할 추억은 얻었지.”
루이스의 거대한 몸집 뒤에서 조르디노가 고개를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봐라, 네가 혼자 나가서 놀다 오면 꼭 이런다니까.”
피트는 그의 장난기 어린 미소 속에서도 진지한 우정의 걱정이 배어 있는 걸 놓치지 않았다.
“다음부턴 네가 대신 가지, 알.”
“사양할게. 너 꼴 보니까 딱 술병 난 사람 같아.” 조르디노가 웃었다.
루이스는 의자에 몸을 털썩 앉았다. “젠장, 덥구만. 이 고물 박물관 배에 에어컨은 없는 거야?”
피트는 루이스의 불편함을 약간 고소해했다. “안됐군, 대령님. 에어컨은 버거운가 보오. 곧 맥주가 올 테니 좀 나아질 거요.”
“지금이라면 갠지스 강물이라도 좋겠군.” 루이스가 투덜거렸다.
조르디노가 몸을 숙였다.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 이런 꼴이 된 거야? 건의 무전에는 미친 개 얘기까지 있던데.”
“말해주지.” 피트가 대답했다. “그 전에 내가 몇 가지 물을 게 있소.” 그는 루이스를 똑바로 보았다. “대령님, 브루노 폰 틸이라는 사람 아시오?”
“폰 틸?” 루이스가 되받았다. “얼핏만. 한번 소개받은 적 있고, 가끔 지역 유지들이 여는 파티에서 본 정도요. 꽤 신비로운 인물이라더군.”
“혹시, 그 사람 사업이 뭔지 아시오?”
“배 몇 척을 가지고 있소.” 루이스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번쩍 뜨며 외쳤다. “미네르바! 그래, 미네르바 라인. 그의 선단 이름이오.”
“처음 듣는 이름이군.” 피트가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루이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타소스를 지나가는 낡아빠진 녹슨 배들을 보면 알 거요.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신기하지.”
피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폰 틸의 배들이 타소스 해안을 따라 운항하오?”
“그렇소. 일주일에 한 척꼴로 지나가더군. 연기통엔 커다란 노란색 ‘M’이 그려져 있어 금방 알아보지.”
“리미나스에 정박하거나 접안하는 적은?”
“아니오. 내가 본 건 남쪽에서 올라와 섬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남쪽으로 되돌아가는 게 전부였소.”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고?”
“서너 번쯤 멈춰 섰소. 오래는 아니고, 길어야 30분. 늘 옛 유적지가 있는 곶 앞바다에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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