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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손전등 불빛이 계단에 흩뿌려진 진득히 말라붙은 혈흔을 비추었다. 가파르고 고르지 못한 석계단 위로 이어진 핏자국은 몇 군데 덩어리로 뭉쳐 있었고, 간혹 작은 방울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피트는 몸을 떨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것은 자신의 오래된 피 때문이 아니라, 바깥의 오후 열기에서 한순간에 눅눅하고 서늘한 미로의 냉기로 바뀐 탓이었다. 계단 끝에서 그는 반쯤 달리기 시작했다. 손전등 불빛은 흔들리며 균열진 천장에서 거칠게 파낸 암반 바닥까지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전날 밤 그를 옥죄던 고독과 공포는 이제 없었다. 옆에는 알 지오디노, 작지만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덩어리, 수년간 믿어온 친구가 함께 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무엇도 나를 막지 못한다. 피트는 이를 악물었다.
어두운 통로가 입을 벌리듯 이어졌다. 피트는 발밑만 주시하며 붉은 얼룩을 분석했다. 갈림길에서는 잠시 멈춰 핏자국을 살폈다. 흔적이 되돌아온 길이라면 막다른 길이었다. 한 줄로 이어지는 곳만 따라갔다. 그의 몸은 극도로 지쳐 있었고, 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흔들렸다. 나쁜 신호였다. 신경의 끝마다 무거운 피로가 내려앉았다. 피트가 비틀거리며 무너질 뻔했지만, 지오디노가 쇠집게 같은 손으로 팔을 움켜쥐어 붙들어 세웠다.
“진정해, 더크.” 지오디노의 목소리가 미약한 메아리와 함께 울렸다. “지금 네 상태로 영웅 흉내 낼 때가 아니야.”
“멀지 않아.” 피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저 굴곡 뒤에 개 사체가 있을 거야.”
하지만 개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거대한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 피트는 무겁게 얼룩을 응시했다. 짙은 피 냄새가 퀴퀴한 공기를 덮었다. 눈앞에서 다시금 장면이 살아났다. 번뜩이던 개의 눈, 어둠 속에서의 돌진, 칼이 살에 박히던 감각, 그리고 울부짖는 비명….
“계속 가자.” 피트는 단호히 말했다.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입구까지 25미터 남았다.”
그들은 산 속 어둠을 뚫고 달렸다. 피트는 더 이상 핏자국을 확인하지 않았다. 몸이 기억하는 길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도 이 길을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불빛은 미친 듯이 흔들리며 현대식 통로로 이어지는 곳을 밝혀냈다.
그리고 거대한 문이 원형 빛에 휩싸였다.
“여기야.” 피트가 거친 숨 사이로 말했다.
지오디노는 문 앞에 무릎을 꿇고, 미세한 틈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젠장.”
“뭐지?”
“바깥쪽에 큰 미닫이 잠금쇠가 있어. 안에서는 열 수 없어.”
“경첩을 보자.” 피트가 불빛을 비췄다. 지오디노는 이미 짧은 쇠지렛대를 꺼내 녹슨 경첩 핀을 뽑고 있었다.
핀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뒤 피트가 문을 살짝 밀자, 삐걱임 하나 없이 1인치 가량 열렸다. 피트는 틈새를 살펴보았다. 인기척은 없었다.
피트는 문을 젖히고 발코니를 가로질렀다. 눈부신 햇살에 잠시 눈을 가늘게 뜬 뒤 계단을 올랐다. 지오디노는 바로 뒤를 따랐다. 서재의 문은 열려 있었고, 바닷바람에 커튼이 출렁였다. 피트는 벽에 붙어 귀를 기울였다. 정적. 아무도 없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방 안으로 몸을 돌렸다.
서재는 비어 있었다. 고전풍의 기둥, 가구, 술장이 그대로였다. 피트의 시선은 곧 모형 잠수함으로 향했다. 그는 다가가 정교한 세공을 살폈다. 검은 마호가니로 만든 함체와 함교, 세세한 리벳과 전함 깃발까지, 당장이라도 작은 선원들이 뛰쳐나올 듯 생생했다. 함교 옆에는 ‘U-19’라 적혀 있었다. 바로 루시타니아호를 격침한 U보트와 같은 계열이었다.
갑자기 지오디노가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
“어디서?” 피트도 낮게 물었다.
“확실치는 않아. 착각일지도 몰라.” 지오디노가 귀를 기울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피트는 다시 모형을 보며 물었다.
“기억나? 이 근처에서 침몰한 1차 대전 독일 잠수함 번호.”
“U-19였지. 근데 왜 지금 그걸 묻는 거야?”
“나중에 설명하지. 어서 가자.”
“겨우 들어와서 그냥 나가자고?” 지오디노가 낮게 투덜거렸다.
“우린 찾을 걸 찾았어.” 피트가 모형을 두드렸다. 그 순간 그는 몸을 멈추고 손짓으로 침묵을 명령했다.
“누가 있다.”
“둘로 갈라지자. 넌 저 기둥 뒤로 가.”
지오디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곧 둘은 긴 소파 뒤에서 다시 합류했다. 천천히 몸을 내밀어 본 순간, 피트는 굳어버렸다.
소파 위에는 테리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단 몇 초였으나, 피트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테리는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검은 머리를 흘린 채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붉은 네글리제를 입은 그녀의 몸은 은은히 비치며 곡선을 드러냈다. 피트는 재빨리 손수건을 입에 틀어막고, 옷자락을 팔 위로 묶었다. 테리가 몸부림쳤으나 이미 늦었다. 그녀는 곧 지오디노의 어깨에 거칠게 들쳐 업혀 햇빛 속으로 끌려 나왔다.
“미쳤군.” 지오디노가 투덜거렸다. “이 난리를 치고 여자 하나 업어 나가다니.”
“닥치고 뛰어.” 피트는 문을 차 올려 열었다. 지오디노가 먼저 빠져나가자 그는 곧바로 문을 닫고 핀을 꽂았다.
“굳이 문을 다시 잠글 필요가 있나?” 지오디노가 불만스럽게 물었다.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왔잖아. 그만큼 시간을 벌어야지. 분명 폰 틸은 내가 피 흘리다 미로에서 죽었다고 생각할 거야.”
그들은 서둘러 어둠을 달렸다. 손전등 불빛만이 길을 열어주었고, 곧바로 다시 어둠에 삼켜졌다. 반복되는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피트는 가방과 불빛을 움켜쥐고 달렸다. 폰 틸의 비밀에 닿았다. 그의 조카까지 내 손에 있다. 그렇게 스스로 되뇌었지만, 묘한 불안이 가슴 한구석을 찔렀다.
다섯 분 뒤, 그들은 계단에 도착했다. 지오디노가 먼저 올라갔고, 피트는 마지막으로 통로를 비추며 뒤돌아보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고통받다 사라졌을까. 이제 남은 건 유령뿐이리라. 그는 얼굴을 굳히고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햇살이 보였다.
그가 철창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아치 옆에서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멋진 취향이군, 신사분들. 하지만 애국자로서 한마디 해야겠소. 그리스 법 아래 유적에서 귀중품을 훔치는 건 엄격히 금지돼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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