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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음모

지중해의 음모 #026

Escaper 2025. 9. 2.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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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2

“폴리키투스 아낙사만데르 제노.” 가이드는 스스로를 소개했다. “당신을 모시는 길잡이요.”

“제노, 하나만 묻지.” 피트는 그의 풀네임을 따라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빠져나올 때, 어떻게 거기 숨어 있었던 거지?”

“난 원래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오.” 제노가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당신과 친구가 내 관광단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걸 보고 생각했지. 저 두 놈은 대체 폐허 속에서 뭘 발견했길래 저리도 열심히 쫓는 걸까? 답이 안 나왔어. 그래서 동료 가이드에게 무리를 맡기고 원형극장으로 돌아왔지. 그때 당신들은 없었어. 그런데 문에 부러진 쇠살이 있더군. 대단한 추리는 아니오. 난 그곳의 돌 하나, 금 하나도 모르는 게 없으니까. 당신들이 나올 거라 확신했고, 그래서 기다렸을 뿐이오.”

“만약 우리가 안 나왔다면, 넌 바보가 됐을 거야.”

“시간 문제였소. 다른 출구는 없으니까. 그게 ‘하데스의 구덩이’요.”

“하데스의 구덩이?” 피트의 눈이 번뜩였다. “왜 그렇게 부르지?”

“뜻밖이군. 갑자기 고고학에 관심을 보이다니. 하지만 물었으니 말해주지.” 제노의 눈에 어리둥절한 빛과 장난스러운 기색이 섞였다. “그리스 황금기 시절, 조상들은 범죄 재판을 원형극장에서 열었소. 배심원은 무려 백 명의 시민들이었지. 다수가 판결할수록 정의롭다는 믿음 때문이었소. 만약 유죄로 판정되면, 피고인은 즉사형과 ‘하데스의 구덩이’ 중 하나를 택해야 했소.”

“그 구덩이가 뭐 그리 나빴다는 거지?” 지오디노가 물었다. 그는 운전대 위 거울에 비친 다리우스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구덩이라기보다, 끝없이 뻗은 지하 미로였소. 출입구는 단 두 곳, 하나는 입구, 다른 하나는 비밀 출구였지. 물론 철저히 감시되었소.”

“그래도 자유로 향할 기회는 있었군.” 피트가 재떨이에 담배 재를 털었다.

“그 기회가 보이는 것만큼 공평하진 않았지. 미로 안에는 굶주린 사자가 살았소. 먹을 건 죄수뿐이었거든.”

피트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러나 곧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폰 틸… 그는 왜 늘 고대의 전설과 연극으로 껍데기를 씌우는 걸까? 어쩌면 이 과도한 연극적 집착이 그의 약점일지 모른다. 피트는 담배를 깊이 빨았다.

“흥미로운 전설이군.”

“전설이 아닙니다.” 제노는 진지했다. “하데스의 구덩이에서 죽은 자들은 헤아릴 수 없소. 비명은 미로를 울렸고, 그 끝은 늘 어둠이었지. 심지어 근래에도 몇몇이 들어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소. 성공적으로 빠져나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소.”

피트는 담배 꽁초를 창밖으로 던졌다. 그는 지오디노를, 그리고 제노를 번갈아 바라보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제노는 잠시 그 미소를 의아하게 응시하다가 이해 못 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다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르세데스는 본도로 접어들었다. 낡은 아스팔트 위를 바퀴가 울리며 달렸고, 양옆의 나무들이 먼지와 잎사귀를 흩뿌리며 흘러갔다. 공기는 차가워졌고, 피트가 몸을 돌리자 석양이 이프삭시온 산 정상에 붉게 내리꽂혔다. 야생 당나귀의 등허리 같다고 묘사했던 고대 시인의 글귀가 떠올랐다. 수천 년 전 묘사가 여전히 맞아떨어졌다.

그러다 차는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포장도로를 벗어나 자갈 깔린 오르막길을 타고 숲이 우거진 협곡으로 들어섰다.

왜 파나기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길을 벗어나는 거지? 왜 가이드가 무장한 첩자처럼 굴지? 오래된 경고음이 피트의 어깨를 다시 툭 쳤다. 억눌리지 않는 불안이 스멀거렸다.

차는 움푹 팬 길을 덜컹거리며 넘더니 가파른 경사로를 오르고, 이내 트럭조차 드나들 수 있는 높다란 문간으로 들어섰다. 낡은 헛간 같은 건물이었다. 벽은 바랜 회녹색 페인트가 에게 해의 햇볕에 벗겨지고 갈라져 있었다. 내부 어둠에 잠식되기 직전, 피트는 독일어로 적힌 낡은 표지판을 스쳤다. 곧 다리우스가 시동을 끄자, 뒤에서 녹슨 문이 끼익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이게 관광청 사무실이라면 예산이 참 빈약하군.” 피트가 비아냥댔다. “겨우 이런 데를 내놓다니.”

제노는 미소만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피트의 심장을 죄는 압박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차가운 깨달음이 밀려왔다. 우린 폰 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어.

피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관광 가이드가 총을 들고 체포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관광버스는 언제나 알록달록한 폭스바겐이지, 검은 메르세데스가 아니었다는 것을. 시간이 다급했다.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끝이었다.

제노가 뒷문을 열며 총을 들이밀었다.

“기억해 두시오. 어리석은 짓은 금물.”

피트는 차에서 내려 앞좌석에 앉아 있는 테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유혹적인 눈빛을 보내더니 그의 손을 꼭 쥐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갑자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피트의 눈이 놀람에 휘둥그레진 채, 그녀는 땀에 젖은 그의 얼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역시 여자는 언제나 똑같군. 피트는 순간적으로 냉소했다. 아무리 세련된 척해도, 위험과 모험이 드러나면 곧장 불타오른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때와 장소가 최악이지.

그는 그녀를 밀어냈다.

“나중에.” 그가 낮게 속삭였다. “관객이 다 집에 간 뒤에.”

“자극적인 한 장면이었소.” 제노가 성급히 말했다. “가시지. 자킨투스 경감은 기다리게 하면 연민이라는 걸 곧잘 잃어버리거든.”

제노는 권총을 허리께로 내린 채 무리에서 다섯 걸음쯤 뒤로 물러섰다. 다리우스가 앞장서 건물의 축구장만 한 내부를 가로질러,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 양옆으로 문이 늘어선 복도로 이끌었다. 그는 왼쪽 두 번째 문 앞에서 멈춰 문을 밀어 열고, 더크 피트와 알 지오디노에게 안으로 들어가라 손짓했다. 테리가 뒤따라 들어오려 하자, 굴통 같은 팔이 벌컥 막아섰다.

“당신은 안 돼.” 다리우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피트가 홱 돌아섰다. 얼굴엔 분노가 드리웠다. “그녀는 우리와 함께 간다.” 차갑게 말했다.

“구출 영웅 노릇은 필요 없소.” 제노가 가볍게 받아치되, 눈빛은 진지했다. “맹세하오. 그녀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겠소.”

피트는 제노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배신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는 포로가 된 처지임에도 이 남자에게 묘한 신뢰를 느꼈다.

“당신 말을 믿지.” 피트가 으르렁거리듯 응수했다.

“걱정 마요, 더크.” 테리가 제노를 차갑게 흘겨보았다. “그 ‘경감’이란 작자가 내가 누군지 알게 되면, 우린 이 비루한 인간들한테서 금방 벗어날 거예요.”

제노는 못 본 체하고 다리우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손님들을 지켜. 바짝. 저 둘, 꽤 영악하거든.”

“방심하지.” 다리우스가 자신만만하게 받았다. 제노와 테리가 맨발로 먼지 쌓인 바닥을 사각거리며 사라지자, 그는 문을 닫고 기대 섰다. 팔을 거대한 가슴 위로 끼고 느슨하게 버티었다.

“개인적으로는,” 지오디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샌 퀜틴 호텔 쪽 숙박이 더 마음에 드는군.” 그의 시선이 다리우스에 박혔다. “적어도 거긴 바퀴벌레가 대형견만 하진 않으니까.”

피트는 다리우스를 겨냥한 그 모욕적인 멘트에 씩 웃으며 방을 훑어보았다. 대략 3미터 곱하기 3미터 남짓. 비틀린 널판을 비틀린 기둥에 대충 박아 올린 벽, 썩어 문드러진 텅 빈 공간. 가구도 창도 없고, 수평으로 갈라진 판자 틈과 지붕의 찢긴 구멍으로만 빛이 스며들었다.

“짐작컨대,” 피트가 말했다. “버려진 창고군.”

“가깝소.” 다리우스가 툭 내뱉었다. “마흔둘에 섬을 점령했을 때 독일군이 탄약고로 썼지.”

피트는 담배를 꺼내 아무렇지 않게 불을 붙였다. 다리우스에게 한 개 권했다간 경계심만 바짝 세울 터였다. 대신 한 발 물러서 라이터를 허공으로 던졌다 받기를 시작했다. 던질 때마다 점점 높여 올리자, 다리우스의 눈이 무의식중에 그 궤적을 좇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네 번. 다섯 번째에는 라이터가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바닥에 덜그럭 떨어졌다. 피트는 멍청한 척 어깨를 으쓱하고 몸을 숙여 집어 들었다.

그리고 돌진했다. 공군사관학교 시절 어느 쿼터백에게도, 어느 하프백에게도 그보다 세차게 들이받은 적이 없었다. 풋볼 태클 자세로 돌격하며 거친 나무바닥을 발톱처럼 움켜쥐고, 어깨와 머리를 공성추처럼 내밀어, 다리우스의 복부 위, 벨트선 바로 위로 치고 올렸다. 순식간, 전력 질주 끝 벽돌담과 충돌한 듯한 감각. 피트는 목이 부러진 줄 알 정도로 숨이 턱 막혔다.

풋볼 용어로 ‘러닝 블록’. 대개는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드는 악랄한 블록이었다. 대다수는 그대로 실신한다. 대다수라면. 다리우스만 빼고. 거인은 낮게 신음하고는 상체를 살짝 웅크렸을 뿐, 곧 피트의 위팔을 움켜쥐어 번쩍 들어 올렸다.

피트는 얼어붙었다. 그런 충격을 받고도 버텨 서 있을 뿐 아니라, 연인에게 툭 치이듯 털어내는 사내가 있다니. 다리우스는 피트를 기둥에 밀어붙이며 천천히, 수직으로 프레첼을 꼬듯 몸을 휘게 만들었다. 이제야 진짜 고통이 몰려왔다. 척추가 당장 똑 하고 부러질 것만 같았다. 시야가 흐려졌다.

다리우스는 눈만 번들이며 압박을 더했다.

그때 갑자기 압박이 풀렸다. 피트가 아득한 의식 속에서 본 것은 다리우스의 입술이 퍼덕이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 다리우스는 무릎을 꺾고 주저앉아, 말없이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지오디노는 피트의 정면 돌격에 길이 막혀 꼼짝 못 하다가, 다리우스가 옆으로 돌아서 피트를 벽에 고정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두 다리를 접었다가 벌리며, 발꿈치로 다리우스의 등허리—콩팥을 후려찼다. 거대한 몸이 충격을 흡수하리라 각오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마치 손볼이 벽면에 맞고 튕겨 나오듯, 지오디노는 반동을 정통으로 맞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잠깐,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곧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흔들어 떨치며 기어서 일어나려 했다.

늦었다. 먼저 회복한 건 다리우스였다. 흉측한 얼굴의 흉터마다 승리감이 번졌다. 그는 몸통으로 덮쳐 지오디노를 깔아뭉갰다. 입가에는 탐욕스러운 미소, 이제 시작될 폭력의 그림자. 쇠처럼 단단한 손이 깍지를 끼고 지오디노의 머리를 감싸 쥐더니, 죔틀이 조여오듯 힘을 더했다.

끝도 없어 보이는 몇 초 동안 지오디노는 몸을 굳힌 채 두개골을 할퀴는 격통과 싸웠다. 그러다 느릿하게 손을 들어 다리우스의 엄지 부근을 움켜쥐고 아래로 비틀었다. 그의 체구에 비해 지오디노는 소처럼 힘이 셌지만, 눈앞의 거구와는 급이 달랐다. 다리우스는 뼈가 비틀리는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어깨를 더 낮추며 힘을 얹었다.

피트는 간신히 발로 서 있을 뿐이었다. 등에서 시작된 바다는 몸 전체로 번졌다. 움직여, 바보야. 지금 당장. 그는 두 손으로 벽을 짚고 몸을 던질 준비를 했다. 그때 등 뒤에서 뭔가가 ‘쑥’ 하고 느슨해졌다. 피트가 돌아보자, 눈에 불꽃이 켜졌다.

벽 널빤지 하나가 기둥에서 뜯겨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다. 한쪽 끝은 녹슨 못에 간신히 붙들려 있었다. 피트는 널빤지를 이리저리 비틀어 뽑아냈다. 쇠못은 피로에 부러졌고, 길이 1.2미터쯤, 두께 2.5센티 남짓한 판자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제발, 너무 늦지 않았길.

피트는 판자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남은 힘을 모아 다리우스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절망은 그 순간 밀물처럼 덮쳤다. 썩은 판자는 땅콩 브리틀처럼 와삭 부서져, 거인의 어깨에서 산산조각났다. 다리우스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지오디노의 관자놀이를 놓아, 잠깐의 숨통을 틔워주더니, 커다란 손날로 휙 쳐서 피트의 명치를 후려갈겼다. 피트는 방 건너까지 휘청 날아가 문설주에 털썩 부딪힌 뒤,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어찌어찌 문고리를 붙잡고 피트는 일어섰다. 휘청거리는 몸, 통증도, 붕대 사이로 배어나오는 피도, 푸르게 질려가는 지오디노의 얼굴도 감각 너머였다. 한 번만 더. 마지막임을 알았다. 그때, 오래전 호놀룰루 바에서 만난 해병 조교의 말이 머리를 때렸다. “세상에서 제일 크고 악독한 놈도, 제대로 한 방 먹이면 무릎 꿇는다. 급소 차기가 답이다.”

피트는 비틀비틀 다가갔다. 지오디노를 압사시키려 몸을 굽힌 다리우스는 그를 보지 못했다.

피트는 다리 사이를 겨냥해 걷어찼다. 발끝이 단단한 뼈와, 말캉하면서도 탄력 있는 무언가를 동시에 강타했다. 다리우스의 손이 지오디노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거대한 손이 허공을 할퀴더니, 그는 옆으로 데굴데굴 구르며 말 없는 고통 속에 몸을 웅크렸다.

“좀비들의 나라에 온 걸 환영한다.” 피트가 지오디노를 일으켜 앉혔다.

“우리가… 이긴 거야?” 지오디노가 속삭였다.

“간신히.” 피트가 받았다. “머리는 어때?”

“찾아봐야 알지.”

“걱정 마.” 피트가 웃었다. “아직 목에 붙어 있어.”

지오디노는 머리선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빌어먹을… 금 간 유리창보다 금이 더 많은 기분이야.”

피트는 다리우스를 흘끗 보았다. 거인은 핏기 없이 잿빛이 되어,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뻗어 있었다. 두 손은 사타구니를 꽉 움켜쥔 채.

“잔치는 끝.” 피트가 지오디노를 일으켜 세웠다. “프랑켄슈타인이 회복하기 전에 사라지자.”

그때였다. 무시무시한 ‘딸깍’ 하는 소리, 그리고 문이 멈춤쇠에 쾅 부딪히는 소리가 두 사람을 얼어붙게 했다. 경고도, 체념의 틈도 없었다. 이제 더는 싸울 힘이 없다는 사실만이 명확했다.

문 안으로 키 크고 마른 사내가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값비싼 아이비리그식 양복 바지주머니에 한 손을 쑥 찔러 넣은 채. 긴 줄기 파이프의 화실을 고르게 문 입술 너머로, 사내는 오랫동안 사색하듯 피트를 바라보았다. 새끈하고 세련된 도시의 남자. 광고회사 AE 같았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사적 공간을 침범해 미안하오, 신사분들. 자킨투스 경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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