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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는 얼어붙은 채 충격을 삼켰다. 한쪽 다리는 바깥에, 다른 쪽은 어색하게 통로 안에 꺾인 채, 그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손전등과 가방을 뒤로, 계단 아래로 던져버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눈부신 햇빛에 시야가 서서히 적응하자, 낮은 돌담에서 몸을 떼어내 앞으로 다가오는 흐릿한 형체가 윤곽을 드러냈다.

“…잘 이해가 안 됩니다.” 피트가 바보 같은 촌뜨기 투로 중얼거렸다. “우린 도둑이 아니오.”

그때 다시 커다란 폭소가 터졌다. 흐릿하던 형체는 그리스 관광청 가이드로 변해 있었다. 하얀 이를 드러낸 미소가 커다란 콧수염 아래 번쩍였고, 햇볕에 그을린 손엔 9밀리 클리센티 자동권총이 들려 있었다. 총구는 피트의 심장 한가운데를 겨누고 있었다.

“도둑이 아니라고요?” 가이드는 흠잡을 데 없는 영어로 빈정거렸다. “그럼 유괴범인가요?”

“아, 아니오.” 피트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장했다.

“낯선 나라에 온 외로운 선원 둘이 잠깐 장난을 친 것뿐이오.” 그는 윙크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알잖습니까.”

“물론 잘 압니다.” 가이드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체포하겠습니다.”

피트는 속이 텁텁하게 말라붙는 패배의 맛을 느꼈다. 이건 최악이야. 재판이고 뭐고, 나라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 그러나 겉으로는 멍청하고 싱거운 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철창 밖으로 한 걸음 나서며 간청하듯 두 손을 펼쳤다.

“믿어주시오. 우린 유괴를 하지 않았소. 보시오.” 그는 테리의 뒤집힌 하체를 가리켰다. “이 여자는 술집의 창녀일 뿐이오. 관광이나 가자며 원형극장에서 만나자고 했지.”

가이드는 흥미로워했다. 남은 손으로 테리의 네글리제를 만지작거리더니, 매끈한 곡선을 가볍게 훑었다. 테리는 다리를 마구 버둥거렸다.

“말해봐요.” 그가 느릿하게 물었다. “얼마를 불렀죠?”

“처음엔 두 드라크마라 했소.” 피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근데 끝내고 나니 스무 드라크마를 달라더군. 우린 당연히 거절했지.”

“그렇겠지요.” 가이드가 무심하게 응수했다.

“그 사람 말이 맞아!” 지오디노가 다급히 내뱉었다. “도둑은 이 더러운 계집이지, 우린 아니야.”

“명연기군요.” 가이드가 말했다. “이런 관객 앞에선 아까운 연기지만. 우리 그리스인들이 삶은 소박할지 몰라도, 머리까지 단순하진 않아요.” 그는 테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 아가씨는 싼 창녀가 아니오. 비쌀진 몰라도, 싸진 않아. 게다가 피부가 너무 희지. 우리 섬 처녀들은 짙고 윤기 나는 색깔과 풍만한 엉덩이로 유명하거든. 이 아가씨는 너무 가늘어.”

피트는 침묵했다. 그는 가이드를 예의주시했다. 조금만 틈이 나면 지오디노가 번개처럼 움직일 터였다. 그리스인은 교활하고 경계심이 높아 보였지만, 피트가 읽어낸 바로는 가학적인 악의는 비치지 않았다. 가이드는 지오디노를 손짓해 불렀다.

“그 여자를 내려놔요. 앞모습을 보게.”

지오디노는 피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테리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녀는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이며 잠시 서 있더니, 지오디노가 묶음을 풀자 곧장 입에 물린 손수건을 뱉어내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 더럽고 썩어빠진 자식!” 그녀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내 아이디어가 아니야, 여보.” 지오디노가 눈썹을 장난스레 치켜올렸다. “저쪽 친구한테 물어봐.” 그는 엄지로 피트를 가리켰다.

테리는 피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무언가 말하려다, 놀란 듯 숨을 삼켰다. 큰 개암빛 눈에 한순간 경악이 스치더니, 차갑게 식었다가, 다시 반짝이는 온기로 채워졌다. 그녀는 피트의 목을 끌어안고 뜨겁게 입을 맞췄다. 상황치곤 지나치게 격정적이었다.

“더크, 정말 당신이었군요.” 그녀가 흐느꼈다. “아까 어둠 속에서 들린 목소리… 확신할 수가 없었어요.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우리 만남은 늘 뜻밖의 연속이지.” 피트가 웃었다.

“브루노 삼촌은 절대 전화 안 할 거라던데.”

“삼촌 말만 믿진 마.”

테리는 그의 코에 붙은 붕대를 발견하고 살짝 손으로 어루만졌다. “다친 거예요?” 걱정과 안타까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삼촌이 그랬나요? 협박했어요?”

“아냐, 계단 오르다 넘어졌을 뿐이야.” 피트가 사실을 조금 비틀었다. “그게 전부야.”

“도대체 이게 무슨 소동이오?” 가이드가 짜증스럽게 끼어들었다. 들고 있던 총이 약간 아래로 내려갔다. “아가씨, 이름부터 말씀해 주시겠어요?”

“난 브루노 폰 틸의 조카예요.” 테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그리스인은 짧게 탄성을 내지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테리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거의 반분 동안凝視한 뒤, 일부러 천천히 총을 다시 들어 올렸다. 표적은 여전히 피트였다. 그는 콧수염을 한두 번 당기며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사실일 수도 있겠군요.” 그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이 두 불쾌한 인간을 감싸려는 거짓말일 수도 있지.”

“우스운 협박은 집어치워요.” 테리는 턱을 쳐들었다. 가슴선까지 도도하게 따라 올라갔다. “그 흉측한 총 내려놓고 사라지세요. 삼촌은 섬 당국에 영향력이 막강해요. 한마디면 당신은 본토 감옥에서 썩게 될 걸요.”

“브루노 폰 틸의 영향력쯤은 잘 압니다.” 가이드는 담담했다. “하지만 나에겐 별 의미가 없죠. 당신들의 체포와 석방은 파나기아의 자킨투스 경감이 결정할 겁니다. 그가 직접 보길 원하겠죠. 그에게 거짓을 말한다면, 당신들 앞날은 몹시 비참해질 겁니다. 이제 저 담장 뒤로 돌아가세요. 약 200야드쯤 가면 차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는 총구를 피트에서 테리로 옮겼다. “경고합니다, 신사분들. 바보 같은 짓은 꿈도 꾸지 마세요. 얼굴 근육 하나만 꿈틀거려도, 이 고운 숙녀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을 겁니다. 가시죠?”

다섯 분 뒤, 그들은 전나무 숲 그늘에 눈에 띄지 않게 세워진 검은색 메르세데스 앞에 섰다. 운전석 문이 열려 있었고, 얼음처럼 새하얀 양복을 입은 사내가 한쪽 발을 바깥에 단단히 딛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가가자, 사내는 일어나 뒷문을 열었다.

피트는 잠시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잘 다려진 흰 양복과 어둡고 흉한 얼굴의 대비가 강렬했다. 자신의 키보다 5센티는 더 커 보이는 거한. 조각으로 깎아낸 석상 같았고, 어깨는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컸다. 최소 120킬로는 나가리라. 비율이 어긋나고 섬뜩한 얼굴이었지만, 묘한 미감이 있었다. 화가가 화폭에 담고 싶어 할 법한. 피트는 속지 않았다. 살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빛을 그는 알았다. 일상처럼 사람을 죽이는 ‘사랑스러운 괴물’들과 그는 여러 번 마주친 바 있었다.

가이드는 차 앞쪽으로 돌아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우스, 손님들이야. 길을 잃은 아기 염소 셋. 자킨투스 경감에게 모시고 가지. 그 앞에서 한바탕 연극을 벌이게 둘 거야.” 그는 피트를 돌아보았다. “그분과의 시간, 즐기게 될 겁니다. 아주 훌륭한 경청자거든요.”

다리우스가 낮고 거친 목소리로 뒷좌석을 가리켰다.

“둘은 뒤로. 아가씨는 앞좌석.”

피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도주 계획을 열댓 가지나 굴려봤다. 그러나 방도는 갈수록 희박했다. 테리가 있는 한, 가이드는 그들을 완벽히 쥐고 있었다. 그녀가 없다면, 자신과 지오디노는 총을 빼앗아 제압할 가늠이라도 해볼 수 있을 터였다. 혹시 여자를 쏘지 못할 거라는 희망도 있었지만, 피트는 그 가설로 테리의 목숨을 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가이드는 억지로 예의를 차리는 시늉을 했다.

“신사답게, 다리우스. 저 아가씨에게 외투를 빌려드려. 그… 눈에 띄는 장점이 운전 중 방해가 될지 모르니.”

“필요 없어.” 테리가 경멸스럽게 잘랐다. “그 더러운 원숭이의 옷은 안 입어. 숨길 것도 없고. 오히려 당신 같은 지렁이가 우물쭈물하는 꼴을 보는 게 즐겁거든.”

가이드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가, 곧 얇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좋을 대로.”

테리는 네글리제를 무릎까지 가볍게 거두고 차에 올랐다. 가이드는 따라 타서 그녀를 가운데에 끼웠고, 다리우스는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운전대를 잡았다. 디젤 엔진이 칙칙거리며 살아나자, 차는 수렁 낀 도랑이 어귀에 연이어 붙은 좁고 굽은 길을 타고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가이드는 피트와 지오디노 사이를 번갈아 노려보았고, 자동권총은 한순간도 테리의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과하게 집요하다, 피트는 속으로 판단했다.

피트는 가이드의 반응을 살피며 천천히 가슴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마찬가지로 느리게 불을 붙였다.

“이봐, 이름이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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