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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킨투스의 눈에 처음으로 악동 같은 기미가 번쩍 스쳤다가, 금세 사라졌다.
“폰 틸의 조카와 꽤 각별하다고 들었네.”
“그 얘길 하는 거라면, 같이 잤지.”
“알게 된 지는 얼마나 됐나?”
“어제 해변에서 처음 만났다.”
자킨투스의 놀람은 서서히 교활한 미소로 바뀌었다.
“상당히 손이 빠르거나, 지독히 능숙한 거짓말장이거나.”
“맘대로 생각하시오.” 피트가 태연히 어깨를 폈다. 뻣뻣해진 근육을 풀며 말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포기하시오.”
“내 머릿속에 뭘 본 건지, 흥미롭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전술.” 피트가 알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더러 테리와의 밀월을 이어가라고 하겠지. 그러면 폰 틸이 날 식구로 받아들이고, 나는 저택을 제 집 드나들 듯 오가며 그 늙은 독일놈의 행적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을 테고.”
자킨투스는 눈을 똑바로 맞췄다.
“통찰이 뛰어나군, 피트. 어때, 참여하겠나?”
“절대 사양.”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어젯밤 저녁 식사 자리에 폰 틸이 있었어. 끝이 영 좋지 않았지. 게다가 개까지 풀어 날 물게 했어.”
자킨투스가 그 농담을 좋아할 리 없다는 건 피트도 알았다. 하지만 뭐 어떤가. 다시 그 지긋지긋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술이 간절해졌다.
“조카랑 자고, 삼촌과 저녁을 먹고, 하루 만에 다 해치웠군.” 자킨투스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빠른 손이야.”
피트는 어깨만 으쓱했다.
“안타깝군.” 자킨투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내부에서 도와줬다면 큰 힘이 되었을 텐데.” 그는 파이프를 빨아 불씨를 선홍빛으로 살렸다. “우리는 저택을 멀찍이서 계속 감시했지만, 수상한 점은 포착하지 못했네. 이백 야드—그게 폰 틸에게 들키지 않고 다가설 수 있는 한계였어. 오늘 관광 가이드로 분장한 우리의 작전이 드디어 결실을 맺나 했지, 당신과 그의 조카를 제노 대령이 체포했을 때 말이야.”
“제노… 대령?”
자킨투스가 일부러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다리우스 대위는 헌병대 소속이지. 엄밀히 말하면, 제노가 계급상 나보다 위야.”
“경찰에 대령이라니? 특이하군.”
“그들 치안 체계를 알면 놀랄 일도 아니지. 아테네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면, 그리스의 농촌과 교외는 국가군 산하의 엘리트 헌병대가 관할하네. 효율도 뛰어나고.”
피트는 제노와 다리우스를 증오했지만, 그 설명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들의 존재는 이해했소. 하지만 당신은? 그리스에서 마약을 쫓는 미 연방 요원이라—스페인에서 스파이를 잡는 FBI 요원만큼 생경하군.”
“보통 사건이라면 맞아.” 자킨투스의 얼굴이 굳고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하지만 폰 틸은 보통이 아니지. 그 자를 철창에 넣고 그 더러운 밀수망을 끝장내는 순간, 국제 범죄의 20%가 자동으로 잘려나갈 거야. 그 비중은 가볍지 않지.” 분노가 치밀어 오른 듯,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각국은 각자 움직였어. 인터폴을 통해 정보만 주고받았지. 이를테면, 우리가 영국으로 향하는 마약 선적을 포착하면 런던 인터폴에 알리고, 거기서 스코틀랜드야드에 경보를 내리는 식으로. 시간이 허락하면 덫을 놓고 검거하고.”
“깔끔하고 실용적인 절차로 들리오.”
“불행히도, 폰 틸에게는 한 번도 통하지 않았지.” 자킨투스가 낮게 말했다. “경고가 몇 번이든, 함정이 몇 겹이든, 그는 늘 그물을 피해갔어. 오물통에서 막 나온 장미처럼 향기롭게.” 그는 책상을 ‘툭’ 두드렸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우리 정부들은 국경을 넘나들고, 어느 경찰 설비든 쓰고, 심지어 군의 인력과 장비까지 지휘할 수 있는 국제 합동수사팀을 허가했어.” 그는 깊이 한숨을 쉬더니 미안하다는 듯 덧붙였다. “말이 길었군. 내가 왜 타소스에 있는지 충분한 설명이 되었기를.”
피트는 자킨투스를 주의 깊게 살폈다. 실패를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몸짓 하나, 말 한마디까지 계산된 인상. 그럼에도 눈 속 어딘가에 미세한 두려움—폰 틸에게 패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번뜩였다. 피트는 더욱 술이 절실해졌다.
“팀의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지? 지금까지 셋밖에 못 봤는데.”
“지금 이 순간, 영국 경감 한 명이 해군 구축함에 올라 퀸 아르테미시아를 추적 중이고, 터키 경찰 대표가 구식 민항 DC-3를 타고 상공에서 감시하고 있어.” 자킨투스의 말투는 문서 낭독처럼 건조했다. “프랑스 수사관 둘은 마르세유 부두 인부로 위장해 급유차 들를 때를 기다리고 있고.”
피트는 현실감이 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말들이 점점 멍청한 웅얼거림처럼 들렸다. 지난 이틀 새 고작 몇 시간을 눈 붙였을 뿐, 피로가 한꺼번에 덮쳐왔다. 그는 눈을 비비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붙들었다.
“잭, 친구.” 피트가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개인적인 부탁 하나만.”
“가능하면 들어주지, 친구.” 자킨투스가 머뭇 웃었다.
“테리를 내 보증 하에 석방해.”
“당신 보증으로?” 자킨투스가 눈썹을 번쩍 치켜올리며 천연덕스럽게 눈을 크게 떴다. 스티브 맥퀸이라도 이만큼은 못 했을 것이다. “뭔 색정적 계략이 숨어 있나?”
“추잡한 건 아니야.” 피트가 진지하게 말했다. “어차피 당신도 그녀를 풀어줄 수밖에 없어. 자유가 되자마자, 테리는 스무 분 안에 저택으로 쏜살같이 돌아갈 거야—모욕당한 여자의 분노만큼 무서운 건 없지. 그리고 브루노 삼촌에게 포로 치욕을 갚으라 악을 쓸 거야. 그 노인은 머리를 굴릴 테고, 한 시간 안에 당신들의 지하망은 산산이 드러나 미국으로 되튀게 만들 거야.”
“우릴 얕보는군.” 자킨투스가 점잖게 받았다. “그런 사태는 충분히 예상했어. 아침이면 우리는 이 근거지를 접고 다른 위장으로 갈아탈 수 있지.”
“이미 늦었어.” 피트가 날카롭게 잘랐다. “상처는 났고, 피는 흘렀지. 폰 틸은 당신들의 존재를 눈치챌 거야. 경계는 배가될 테고.”
“설득력 있군.”
“당연하지.”
“그럼, 그녀를 당신에게 맡긴다면?” 자킨투스가 가늠하듯 물었다.
“테리가 없어진 걸 알게 되면—아니, 벌써 알았을 수도 있어—폰 틸은 타소스를 뒤집어 놓을 거야. 가장 안전한 곳은 퍼스트 어템프트 호야. 적어도 섬 구석구석을 다 뒤지기 전까진 거기까지는 생각 못 할 걸.”
자크는 잠시 동안 피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좋은 지위와 영향력 있는 가문을 지닌 사내가 왜 이토록 위험하고 험한 일을 자청하는지, 언제 잘못 발을 디뎌 경력은 물론 목숨까지 잃을지 모를 일을 왜 하는지 의아해하면서. 그는 파이프를 재떨이에 두드려 낡은 브라이어 관에서 재를 털어냈다.
“좋소, 그대로 하리다.” 자크가 낮게 말했다. “단, 아가씨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걱정 없소.” 피트가 웃었다. “국제 마약 밀매 따위보다, 나랑 배로 몰래 빠져나가는 쪽이 훨씬 흥미로울 테니까. 게다가… 모험을 가끔 맛보고 싶어 하지 않는 여자를 보여주면, 난—”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문이 열리며 지오디노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제노가 뒤따랐다. 지오디노는 천사의 얼굴에 넉살스러운 웃음을 번쩍 띠고 있었고, 한 손에는 메탁사 파이브 스타 브랜디 병을 움켜쥐고 있었다.
“제노가 찾아냈다네.” 지오디노는 병뚜껑을 휙 벗겨내고는 향을 맡더니, 황홀을 가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이 사람들, 그리 나쁜 놈들은 아닌 것 같아.”
피트는 웃으며 제노를 향했다.
“지오디노는 술만 봐도 이성을 잃으니 양해하시오.”
“그렇다면,” 제노가 콧수염 밑으로 웃음을 흘렸다. “우리, 공통점이 많군.”
그는 지오디노를 비켜서더니, 책상 위에 잔 네 개가 놓인 쟁반을 내려놓았다.
“다리우스는 어때?” 피트가 물었다.
“벌써 일어났소.” 제노가 대답했다. “며칠은 절뚝거리겠지만.”
“유감이라 전해주시오.” 피트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는—”
“사과할 것 없소.” 제노가 말을 잘랐다. “우리 일에선 흔한 일이니까.” 그는 피트에게 잔을 건네며 처음으로 피트의 피 묻은 셔츠를 눈여겨보았다. “당신도 꽤 다친 것 같은데.”
“폰 틸의 개가 남긴 선물이오.” 피트는 잔을 빛에 비추며 대답했다.
자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피트가 폰 틸을 증오하는 이유를 완전히 이해했다. 그는 힘을 빼고 의자에 기대어, 피트가 복수에만 몰두해 있음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배로 돌아가면, 무전으로 폰 틸의 동향을 계속 알려주겠소.”
“좋소.” 피트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는 브랜디를 홀짝이며, 불덩이 같은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위장으로 흘러내리는 감각을 즐겼다. “부탁 하나만 더, 자크. 공식 신분을 이용해 독일로 몇 통 전보를 보내주시오.”
“물론이지. 내용은?”
피트는 이미 패드와 연필을 집어 들고 있었다.
“이름과 주소까지 내가 다 적겠소. 독일어는 좀 엉터리 철자가 될 테지만.”
그는 글을 마치고 패드를 자크에게 건넸다.
“답신은 퍼스트 어템프트호로 보내달라고 전하시오. 무전 주파수도 적어놨소.”
자크는 패드를 훑었다.
“동기가 이해되지 않는데.”
“그냥 직감일 뿐.” 피트는 잔에 메탁사를 다시 채웠다. “그나저나, 퀸 아르테미시아호가 타소스를 경유한다던데, 언제쯤이지?”
“뭐라… 어떻게 그걸 알았지?”
“내가 예지력이 있거든.” 피트가 짧게 잘랐다. “언제?”
“내일 새벽.” 자크가 오랫동안 피트를 가만히 보며 답했다.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왜 묻지?”
“그냥, 궁금해서.” 피트는 잔을 단숨에 비우며 불덩이 같은 열기를 삼켰다. 충격은 거의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깜빡여 흘려 보냈다.
“세상에.” 그는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건 마치 배터리 산을 삼키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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