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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음모

지중해의 음모 #030

Escaper 2025. 9. 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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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처럼 푸른 인광을 뿜던 포말이 서서히 잦아들더니, 노후한 퀸 아르테미시아의 곧추 선 선수(船首)에서 흘러내려갔다. 느릿하게 선수가 멈추고, 닻이 열 길 물속으로 덜걱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항해등이 깜박이며 꺼졌다. 더 검은 바다 위에 더 검은 윤곽만 남았다. 마치 퀸 아르테미시아란 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백 피트 떨어진 곳,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너울에 게으르게 들썩였다. 어디서나 흔히 떠도는, 세상의 모든 바다와 수로 위에 버려진 빈 상자들과 다를 바 없는 포장 상자였다. 얼핏 보면 그저 해상 표류물처럼 보였고, “이쪽이 위”라는 스텐실 글자조차 우스꽝스럽게도 바다 밑을 향해 있었다. 단 하나, 이 상자를 남다르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비어 있지 않다는 것.

더 나은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피트는 상자 안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너울이 상자 위를 때릴 때마다 천장이 머리를 툭툭 쳤다. 그래도 날이 밝기 전에 맨몸으로 물 위를 헤엄치며 들키는 것보단 만 배 낫다. 그는 짭짤한 바닷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가 켁켁 뱉었다. 그런 다음 부력 조끼의 마우스피스를 살짝 불어 부력을 더하고, 톱니처럼 잘라낸 구멍으로 배를 다시 주시했다.

퀸 아르테미시아는 고요했다. 발전기에서 울리는 희미한 웅웅거림과, 선체를 때리는 물결 소리만이 존재를 알렸다. 시간이 갈수록 소리마저 가라앉아 배는 침묵의 일부가 되었다. 피트는 오래도록 귀를 기울였지만 다른 소리는 물 위를 건너오지 않았다. 철판 위 구두발자국도, 명령을 고함치는 남자 목소리도, 설비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도… 아무것도. 침묵은 완벽했고, 그만큼 수수께끼였다. 유령 선박, 유령 선원.

우현 닻이 내려가 있었고, 피트는 상자를 안에서 밀며 천천히 그리로 다가갔다. 산들바람과 밀물이 도와주어, 곧 상자는 닻줄에 살짝 닿았다. 그는 미 해군표 다이버용 공기통을 벗겨 백팩 웨빙을 굵은 체인 한 고리에 꿰었다. 그리고 레귤레이터의 단일 호스를 생명줄 삼아, 오리발·마스크·스노클을 세컨드 스테이지 마우스피스에 걸어, 장비 전부를 수면 바로 밑에 매달았다.

피트는 체인을 붙잡았다. 고리들이 끝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올려보니, 마치 잭이 콩나무를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퍼스트 어템프트의 포근한 침상에서 잠든 테리를 떠올렸다. 부드럽고 유연한 그녀의 몸을 떠올리면서,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리도 의아해하긴 했다. 다만 이유가 달랐다. “왜 날 배로 데려가요? 이런 꼴로 똑똑한 과학자들 앞에 나갈 순 없잖아요.” 그녀는 투명한 네글리제의 자락을 들어 올려 허벅지까지 드러냈다.

“뭐 어떤가.” 피트가 웃었다. “아마 그 사람들 인생에서 가장 섹시한 이벤트가 될걸.”

“브루노 삼촌은요?”

“본토에 쇼핑 갔다고 해. 뭐 아무 말이나. 넌 성인이잖아.”

“가끔 나쁜 짓 하는 것도 재밌겠네요.” 그녀가 낄낄 웃었다. “영화 속 모험담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지.” 피트가 말했다. 그는 그녀가 그렇게 받아들일 거라 짐작했고, 정확히 맞췄다.

피트는 코코넛 따러 야자수 타는 폴리네시아 원주민처럼 닻줄을 올랐다. 곧 호저홀에 닿아 난간 너머를 내다보았다. 그는 숨을 죽이고, 그림자 속 움직임을 기다렸다. 한 사람 그림자도 없었다. 선수 갑판은 텅 비었다.

그는 난간을 넘어, 몸을 낮춘 채 무소음으로 포어마스트까지 움직였다. 블랙아웃 된 배는 축복이었다. 화물등이 켜졌다면 선수와 중앙 갑판은 새하얀 홍수에 잠겼을 테고, 몰래 기어다니기에 최악이었으리라. 어둠이 선수에 질질 흐르는 젖은 물자국을 삼켜주는 것도 고마웠다. 그는 멈춰 섰다. 나올 법한 소리와 움직임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조용했다. 또 하나—피트의 무의식에 걸리는 납득 안 가는 무언가가 있었지만, 정체를 짚을 수 없었다. 지금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장딴지에 맨 다이버 나이프를 뽑아, 일곱 인치 스테인리스 칼날을 앞에 세운 채 선미 쪽으로 움직였다.

믿기 힘들게도, 함교가 훤히 보였고, 눈에 들어오는 한도 내에선 버려진 듯했다. 그는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어, 발소리 하나 없이 사다리를 타고 브리지로 올랐다. 조타실은 어둡고 비어 있었다. 외로운 바퀴살이 어둠 속에서 뻗어 있었고, 나침의는 말 없는 황동 파수꾼처럼 서 있었다. 전신기가 “전정지”를 가리키는 건 각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좌현 창틀 아래 선반을 더듬었다. 알디스 램프, 신호총, 조명탄… 그리고 행운이 따랐다. 손끝에 익숙한 원통형—손전등이 닿았다. 그는 수영 팬츠를 벗어 렌즈에 돌돌 감아, 불빛이 희미한 틈새만 새도록 했다. 그리고 바닥, 격벽, 장비를 샅샅이 훑었다. 계기반의 작은 상태등만이 생기를 내비쳤다.

조타실 뒤 해도실은 커튼이 걷혀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청결했다. 해도는 정돈돼 겹겹이 쌓였고, 사각 격자와 숫자 위에 정확하고 반듯한 연필선이 가로질러 있었다. 피트는 칼을 집어넣고 《브라운 항해 연감》에 손전등을 괴어, 표식을 훑었다. 선들은 상하이에서 퀸 아르테미시아가 밟아온 항로와 정확히 일치했다. 나침 편차 계산에는 수정 흔적 하나 없었다. 너무 깔끔했다. 지나치게.

항해일지는 마지막 기록으로 펼쳐져 있었다. 03:52—브래디 비필드 등대 방위 312도, 약 8마일. 남서풍 2노트. 신들이 미네르바를 지키소서. 피트가 해변에서 수영을 시작하기 채 한 시간도 안 된 시점의 기록이었다. 그런데 선원은 어디로? 갑판 당직은 없고 구명정은 거치대에 고이. 버려진 조타가 말이 되는가? 아무것도 납득이 안 됐다.

피트의 입안은 바싹 말랐다. 혓바닥은 고무 스펀지처럼 말라붙었다. 머릿속에서 망치가 쾅쾅 울려 생각이 흐려졌다. 그는 문을 조용히 닫고 조타실을 나와, 선장의 선실로 이어지는 복도를 찾았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피트는 숨소리조차 죽이고, 옆걸음으로 강철 상자 안으로 스며들었다.

영화 세트. 딱 그 꼴이었다. 모든 게 말끔하고 제자리, 있어야 할 곳에. 맞은편 격벽엔 퀸 아르테미시아의 유화가 아마추어 솜씨로 고요히 떠 있었다. 보라빛 바다 위를 가는 배—색채감에 피트는 소름이 돋았다. 우하단엔 서피아 레믹이란 서명이. 책상 위엔 싼 금속 프레임에 담긴, 인자한 얼굴의 중년 여인 사진. 내 마음의 선장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서명은 없지만, 화가와 같은 필체였다. 사진 옆, 텅 빈 책상판 위엔 공들여 내려놓은 파이프 하나가 빈 재떨이에 쉬고 있었다. 피트는 검게 그을린 화실을 맡았다. 몇 달은 태운 적이 없는 냄새. 흔적이 없다. 손이 닿은 기미조차. 먼지 없는 박물관, 향내 없는 집. 그리고 배처럼, 무덤 같은 정적.

그는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누구냐! 혹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하는 목소리라면 뭐든지 듣고 싶었다. 정적이 식은땀을 차갑게 만들었다. 피트는 그림자진 모서리마다 어렴풋한 형체를 보기 시작했다. 심장이 가속 페달을 밟듯 뛰었다. 채 십 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으나, 그는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이성을 억지로 되돌렸다.

곧 동틀 것이다. 서둘러. 서둘러야 한다. 그는 좌현 복도를 내달려, 은밀함 같은 건 팽개치고 다른 선실 문들을 확확 열었다. 캘커타의 검은 감방이라도 되는 듯, 움푹 파인 작은 방들. 가리운 손전등 한 번 휙 비추면 선장실과 똑같은 이야기. 그는 무전실도 뒤졌다. 송신기는 따뜻했고, VHF 주파수로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무전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피트는 문을 닫고 선미로 향했다.

횡통로, 좌현·우현 복도… 모두 끝 모를 지하 터널로 이어진 듯했다. 방향감각을 잃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검은 꿈속, 회색 도료와 강철 벽들로 이루어진 공간에, 부력 조끼만 입은 알몸의 사내 하나. 그는 격벽 단턱에 걸려 넘어지며 정강이를 세게 부딪치고, 손전등을 떨어뜨렸다. “젠장!” 하는 욕설과 절묘한 합창.

손전등은 딱딱한 바닥에 떨어져 렌즈가 산산이 가며 꺼졌다. 피트는 손발로 기어가며 더러운 욕을 중얼대고 허둥지둥 더듬었다. 영원의 몇 초 끝에, 알루미늄 하우징이 손에 잡혔다. 천에 싸인 렌즈 유리가 안에서 사납게 딸랑거렸다. 그는 스위치를 밀었다. 전구는 전과 다름없이 희미하게 살아났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좁은 빛줄기를 통로 끝으로 보냈다. 화재 통로—3번 화물창이라는 문패가 어슴푸레했다.

칼즈배드 동굴 못지않게 웅장한 철제 동굴이 3번 창고였다. 빛이 닿는 건, 데크에서 해치 커버까지 나무 받침에 층층이 쌓인, 헤아릴 수 없는 포대뿐. 공기에는 달큰한 향이 스몄다. 실론산 코코아군. 피트는 자루 한 귀퉁이를 칼끝으로 반인치쯤 갈랐다. 돌처럼 단단한 콩이 우수수 쏟아져 퀀셋 막사를 때리는 우박처럼 데크를 굴렀다. 손전등 아래 비춰보니, 양피지 껍질의 콩은 진짜였다.

갑자기 소리가 났다. 희미했고,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분명 거기 있었다. 그는 얼어붙었다.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만큼 갑작스레 멎었다. 다시 배를 감싼 침묵. 어둠과 비밀을 품은 유령선. 정말 유령선일지도. 피트는 생각했다. 또 다른 메리 셀레스트, 혹은 플라잉 더치맨. 폭풍우, 상갑판을 후려치는 비, 밤하늘을 찢는 번개, 지렛대와 데릭 사이를 울부짖는 돌풍만 없을 뿐.

더 볼 건 없어 보였다. 피트는 화물창을 나와 기관실로 향했다. 올바른 통로를 찾느라 소중한 8분을 까먹었다. 배의 심장은 엔진 열에 따끈했고, 뜨거운 기름 냄새가 났다. 그는 거대한 정지 기계 위 catwalk에 서서, 인간이 일한 자취를 찾았다. 희미한 빛줄기가 격벽을 따라 가지런히 뻗은 황동 배관을 핥고 지나, 밸브와 게이지의 복합체에 닿았다. 그때 흐릿한 광선이 구겨 던진 기름걸레를 붙잡았다. 그 위쪽 선반에는 커피 얼룩 묻은 컵들, 왼쪽엔 기름때 묻은 손자국이 남은 공구 트레이. 적어도 여기선 누군가 일했다. 피트는 안도했다. 보통 기관실은 병동처럼 깨끗하지만, 여긴 지저분했다. 그런데 기관장과 오일맨들은? 그들이 에게해 공기로 증발했단 말인가.

나가려던 참에, 그는 멈췄다. 다시, 그 소리였다. 선체를 타고 울려오는 신비한 소리. 그는 숨을 멈추고 돌처럼 서 있었다. 영원처럼 긴 순간. 가라앉은 암초나 산호에 용골이 미끄러지는 듯한, 오싹한 소리. 피트는 떨었다. 칠판 위 분필이 끽끽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십여 초쯤 울리다가, 쇳덩이가 쇳덩이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로 끝났다.

그는 샌 퀸틴 사형장 대기실에서 식은땀을 흘려본 적이 없었다. 없어도, 묘사는 할 수 있었다. 검은 미지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발소리를 기다리며, 밀실 공포 속에 홀로 있는 것—피가 식는 경험. 의심스러울 때는, 죽어라 뛰어라. 그래서 그는 죽어라 뛰었다. 복도를 거꾸로, 사다리를 거꾸로, 마침내 갑판 위, 순수한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 때까지.

새벽은 아직 어두웠고, 데릭은 벨벳 하늘의 별빛 천장으로 뻗어 있었다. 바람은 거의 없었다. 라디오 마스트가 은하수를 가로지르며 흔들렸고, 발밑 선체는 잔 너울에 맞춰 삐걱거렸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며, 해안선의 검은 윤곽을 보았다. 타소스까지 고작 한 마일. 다시 물 표면의 매끈한 흑유리. 초대하는 듯, 평화로웠다.

손전등은 아직 켜져 있었다. 그는 자신을 욕했다. 갑판에 나왔을 때 꺼두었어야 했다. 네온사인으로 ‘나 여기 있어요’ 켠 거나 다름없잖아. 그는 재빨리 불을 껐다. 그리고 깨진 유리에 베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수영 팬츠를 풀어 렌즈 조각을 꺼냈다. 아주 작은 파편들을 난간 너머로 흩뿌렸다. 연못에 비가 스미듯 어슴푸레한 물소리가 들릴 때까지. 손전등도 던져버릴까 유혹이 스쳤지만, 머리가 작동하며 그 욕구를 거부했다. 조타실 랙을 빈자리로 남겨두는 건, “방금 전, 당신 배에 새벽 도둑이 들어 이 구석 저 구석 다 뒤졌어요”라고 선장—있다면—에게 전보를 치는 꼴이었다. 세계 최정상급 수사기관을 골려먹는 놈들과 상대하면서, 그건 멍청한 짓이다. 렌즈가 없는 건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손전등을 제자리에 꽂으려 조타실로 서둘러 돌아갔다. 시계를 보니 4시 13분. 곧 해가 달아오를 것이다. 광란하듯 서둘렀다. 날이 트기 전에 배에서 내려 장비를 차고, 물 위로 최소 이백 야드는 떨어져야 했다.

앞갑판은 여전히, 적어도 겉보기엔, 비어 있었다. 뒤에서 파닥이는 소리가 났다. 피트는 번개처럼 몸을 돌리며, 팽팽해진 신경줄 위에 칼을 번쩍 뽑아 올렸다. 공포가 한계까지 조여왔다. 머릿속은 북소리처럼 쿵쾅댔다. 지금 들키면 끝장이다. 거의 다 왔는데.

별에서 날아온 갈매기 한 마리가 통풍구에 내려앉아 있었다. 녀석은 작은 눈으로 피트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새벽부터 구명조끼만 걸치고, 한 손엔 칼, 한 손엔 수영복을 든 채 배 위를 내달리는 괴상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궁금하다는 표정. 안도감에 무릎이 풀렸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배에 올랐을 때 무엇을 기대했든, 그가 찾은 건 낯선 공포로 양념된 정적. 그는 난간에 축 늘어져, 스스로를 추슬렀다. 이 속도로라면 해 뜨기 전에 심근경색이나 신경쇠약이 먼저 올 판. 그는 깊이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었다. 공포가 가라앉을 때까지.

뒤돌아보지 않고, 그는 난간을 넘었다. 닻줄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유령선에서 떠난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웠다. 물속은 품을 열고 위험으로부터 거리를 선사했다.

수영 팬츠를 다시 입고 장비를 끌어올리는 데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잔물결에 철판 선체에 떠밀리며, 어둠 속에서 어쿠알렁 탱크를 등에 메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초기 잠수 시절 ‘분실·회수’ 경험이 도움이 됐다. 그는 나무 상자를 찾았지만, 이미 밤의 커튼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물결과 밀물이 상자를 해변 절반쯤까지 데려갔을 것이다.

그는 물에 엎드려, 퀸 아르테미시아의 용골 밑을 잠수해 선저를 살펴볼지 잠시 저울질했다. 기관실에서 들은 그 괴상한 긁힘은 선체 외부, 용골 아래에서 온 듯했다. 그러나 무망했다. 수중등 없이 보일 리 없다. 면도날 같은 따개비로 뒤덮인 400피트짜리 선체를 장님처럼 더듬을 기분도 아니었다. 그는 오래된 ‘키일홀링’의 야만적 처벌담을 떠올렸다. 1786년 티모르 앞바다에서 H.M.S. 컨피던트의 포수가 선장의 브랜디 한 잔 훔쳤다가 용골 아래로 끌려가, 몸이 리본처럼 썰리고 늑골과 척추의 흰빛이 드러났던 이야기. 살아날 수도 있었겠지만, 갑판에서 끌어올리기 전, 피 냄새에 이끌린 마코 상어 두 마리가 달려들어, 선원들의 눈앞에서 산 채로 물어뜯어 먹었다고. 피트는 상어가 뭘 할 수 있는지 안다. 키웨스트에서 소년 하나를 백사장에서 끌어올린 적이 있었다. 녀석은 살았지만, 왼쪽 허벅지엔 평생 메울 수 없는 살덩이 공백이 남았다.

피트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런 생각을 멈춰라. 귓속이 윙 하고 울렸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소리는 커졌다. 속도가 붙었다. 출처를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의 발전기가 다시 돈 것이다. 항해등이 켜졌고, 퀸 아르테미시아는 갑자기 생동하는 소리로 살아났다. 용기보다 신중이 나을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 피트는 레귤레이터를 물고 배에서 멀찍이 몸을 날렸다. 잉크 같은 물속에서 그는 다리 힘을 쥐어짜 차올랐다.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고, 들리는 건 기괴한 배기방울 소리뿐. 이럴 때마다 담배 끊을걸 하는 후회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쉰다섯 야드쯤 나갔을 때, 그는 수면으로 올라 배를 바라봤다.

퀸 아르테미시아는 묘박지에서 묵묵히, 묘비처럼 서 있었다. 동녘이 밝아오며, 오래된 그림자극처럼 윤곽이 선명해졌다. 여기저기서 흰빛이 하나둘 피어났고, 우현 녹등이 깜박였다. 몇 분간 더 움직임이 없었다. 이윽고 아무 신호도, 고함도 없이, 닻이 바닥에서 들려 올라와 선체에 철컥 부딪혔다. 조타실엔 불이 들어와, 선명히 보였다.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그는 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다. 유령극의 마지막 막은 아직 남아 있었다. 마치 큐 사인이라도 받은 듯, 기관전신기가 잔잔한 새벽바다를 가로질러 딸랑 울렸다. 엔진은 부드럽게 응답했고, 배는 항해를 이었다. 그 악한 화물의 비밀을 강철판 어딘가에 잠근 채.

피트가 배가 움직인다는 걸 확인하려면 눈으로 볼 필요가 없었다. 물을 통해 전해지는 프로펠러의 박동이 느껴졌다. 쉰다섯 야드면 충분했다. 그 거리라면 망보기에게도 보이지 않고, 거대한 스크루에 빨려들어 생선밥이 될 염려도 적다.

거대한 선체가 그의 머리 위를 미끄러져 지날 때, 좌절이 거센 물결처럼 몰려왔다. 발사대에서 솟구쳐 올라, 예정된 궤도를 타고 파멸과 죽음을 향해 날아가는 탄도미사일을 지켜보는 기분. 그는 무력했다. 막을 수 없다. 퀸 아르테미시아 어딘가엔 북반구 절반을 황홀 속에 익사시킬 만큼의 헤로인이 숨겨져 있다. 도시와 마을마다, 그 악성 중독을 먹잇감 삼는 시정잡배들에게 뿌려진다면 어떤 혼돈이 일어날까. 몇이나 흐물흐물한 잔재가 되어 죽음으로 갈까. 130톤의 헤로인. 학교에서 애들이 장난삼아 부르던 노래가 떠올랐다. “벽에 걸린 맥주 백 병.” 어감은 비슷했다. 다만, 그건 가벼운 마음과 영혼을 위한 노래였지, 약물에 진창 빠진 정신과 잃어버린 희망을 위한 노래가 아니었다.

그리고 피트는 자기 자신을 생각했다. 노란색 알바트로스를 떨어뜨린 것도, 퀸 아르테미시아를 뒤지고 무사히 빠져나온 것도 자랑이 아니었다. 그는 제 할 일이 아닌 일에 목을 건, 멍청이일 뿐이었다. 그의 임무는 해양조사 원정의 지원. 누가 마약 밀수범 쫓으라 했나. 무엇을 해낼 수 있나? 그는 인류의 수호천사가 아니다. 폰 틸과의 쫓고 쫓기는 놀이를 하는 건 자킨투스, 제노, 인터폴,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경찰 몫이다. 그게 그들의 게임이고, 그들이 훈련받았고, 그들이 월급을 받는 이유다.

그는 또 욕설을 삼켰다. 상념에 빠져 시간을 너무 흘렸다. 해안으로 돌아갈 때다. 그는 기계적으로 배의 불빛이 새벽 어둠 속으로 한 점씩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해가 수평선 위로 설핏 고개를 내밀고, 타소스의 바위투성이 산등성이를 비출 때, 그는 막사장에 올라섰다.

피트는 탱크를 벗어 젖은 모래 위에 내려놓고, 레귤레이터와 마스크, 스노클도 옆에 툭 떨어뜨렸다. 탈진의 촉수들이 몸을 휘감자, 그는 손과 무릎을 모래에 대고 주저앉았다.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정신은 다른 데 가 있었다.

선상에서 헤로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마약국이나 세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건 분명했다. 수면 아래—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조심성 많은 수사원들이라면, 접안하면 잠수부를 내려 선체隅角까지 샅샅이 훑을 것이다. 게다가 그만한 화물을 어떻게 내리나? 물에 떨궈 나중에 건진다? 그것도 안 통한다. 너무 눈에 띈다. 130톤의 고형 물질을 담은 방수 용기를 회수하려면, 대대적인 인양작전이 필요하다. 아니다. 더 교묘한 방식이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은 비결.

그는 다이버 나이프를 집어, 젖은 모래에 퀸 아르테미시아의 윤곽을 휘갈겼다. 그러다 문득, 도식으로 그려보는 게 흥미로워졌다. 그는 일어나, 길이 약 30피트쯤의 선체를 그렸다. 브리지, 화물창, 기관실—기억나는 디테일을 모조리 흰 모래에 새겼다. 몇 분이 지나자, 배는 형태를 갖췄다. 피트는 작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해변을 비틀거리며 지나던 늙은이와 당나귀를 보지 못했다.

노인은 발걸음을 멈춰, 세월에 단단히 굳은 얼굴로 피트를 응시했다. 어리둥절함을 드러낼 표정도 남아 있지 않은 얼굴. 잠시 후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당나귀를 따라 느릿느릿 사라졌다.

마침내 도식은 마지막 횡통로까지 거의 완성됐다. 피트는 새 햇살에 번쩍이는 칼끝으로 마지막 농담을 더했다. 작은 통풍구 위의 작은 새 한 마리. 그는 물러서서 작품을 감상했다. 한참 바라보다가, 픽 웃음이 났다. “하나 확실한 건, 난 화가로 칭송받을 일은 없겠군. 배라기보다 임신한 고래잖아.”

그는 멍하니 모래 도식을 응시했다. 갑자기 눈이 초점을 잃고, 거친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지워졌다. 터무니없지만 기발한 불씨 하나가 의식 속에 일렁였다. 처음엔 너무 요상한가? 싶었지만, 곱씹을수록 가능해 보였다. 그는 재빨리 모래 위에 선을 덧댔다. 완전히 몰입해, 머릿속 그림과 도식을 맞춰 달렸다. 마지막 수정을 마치자, 입가에 느리게 냉랭한 미소가 걸렸다. 빌어먹을, 폰 틸. 영리하긴 지독히도 영리하군.

이제 더는 피곤하지 않았다. 풀 수 없던 물음표들이 가벼워졌다. 새로운 접근, 새로운 답. 진작 떠올렸어야 했다. 그는 잠수 장비를 챙겨, 해변과 해안도로를 가르는 둔덕을 타고 올라갔다. 이제 그만둘 생각은 없다. 다음 이닝이 가장 재미있을 것이다. 언덕마루에 올라, 그는 모래 위 퀸 아르테미시아를 돌아보았다.

불어오른 파도가 막 선미 깔때기를 쓸고 지웠다. 큼지막한 미네르바의 ‘M’이 그려진 깔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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