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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말입니다.” 국장이 덧붙였다. “순도 높은 헤로인을 섞어 양을 불릴 때 자주 쓰이지요. 중간상이 한 번, 소매상이 또 한 번 희석하면, 원래 물량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납니다.”

피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130톤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던 겁니까?”

“시작이 될 수도 있었지요.” 자킨서스가 대답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친구. 만약 당신과 지오디노가 타소스에 그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는 시카고에서 줄줄이 손잡고, 서로를 레이크 미시간에 걷어차 넣고 있을 겁니다.”

피트가 씨익 웃었다. “운이었을 뿐입니다.”

“운이라 부르든 뭐라 부르든.” 자킨서스가 쏘아붙였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미국 내 최대 규모 마약 수입업자 서른 명 이상을 기소 대기시켜 놓았고, 운송 회사 관련자 전원까지 걸려들었지요. 그리고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공장 사무실을 수색하다가,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2천 명 가까운 딜러들의 명단이 담긴 장부를 발견했거든요. 우리 국으로선 금맥을 발견한 셈이었지요.”

지오디노가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중독자들에겐 올해가 최악이겠군.”

“그렇습니다.” 자킨서스가 말했다. “주요 공급망이 끊기고, 현지 경찰들이 딜러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니, 지난 20년 중 가장 심각한 ‘마약 기근’을 맞게 될 겁니다.”

피트의 눈은 방을 떠나 창밖 허공을 응시했다. “단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자킨서스가 고개를 들었다. “뭐죠?”

피트는 당장 답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 노친네 말입니다. 신문엔 어디에도 안 보이던데, 어떻게 됐습니까?”

“그 전에 이걸 보시죠.” 자킨서스가 서류가방에서 사진 두 장을 꺼내 책상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피트는 몸을 숙여 찬찬히 살폈다. 첫 번째는 밝은 머리칼을 한 독일 해군 장교의 스냅샷이었다. 그는 배의 함교에 서서 망원경을 목에 건 채 태평스레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 번째 사진의 얼굴은 피트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면도를 해버린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의 냉소적 표정이었다. 아래쪽에는 커다란 흰 개가 앉아 있었다. 피트의 등줄기로 서늘한 오싹함이 기어올랐다. 그는 너무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다지 닮은 데가 없어 보이는데요.”

자킨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베르트 제독은 치밀하게 꾸몄습니다. 흉터, 점, 심지어 치아 보철물까지 폰 틸과 똑같이 맞췄지요.”

“지문은요?”

“불가능했습니다. 폰 틸의 지문 기록이 없었고, 하이베르트는 수술로 자기 지문을 바꿔놨거든요.”

피트는 난감한 표정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불청객의 디테일 덕이지요.” 자킨서스가 천천히 말했다. “범죄자는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해도, 결국엔 예기치 못한 사소한 디테일에 발목이 잡히는 법입니다. 하이베르트의 경우엔 바로 폰 틸의 두피였지요.”

피트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젊은 시절 폰 틸은 ‘원형 탈모증’이라는 피부병에 걸려 완전히 대머리가 됐습니다. 하이베르트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폰 틸이 프로이센 전통에 따라 삭발한 줄 알고, 자연스레 면도를 해버렸던 거죠. 전범 조사관들이 머리카락이 자라는 걸 눈치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후 결정적 증거들이 이어졌지만, 그게 관 속에 못을 박은 첫 번째였습니다.”

피트의 얼굴에 막연한 안도감과 만족이 어렸다. “이미 목을 맨 겁니까?”

“나흘 전에요.” 자킨서스가 담담히 말했다. “신문에 안 난 건, 독일 정부가 조용히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전범 색출 소식이 나올 때마다 나치 과거가 들춰지는 게 이제 지긋지긋하거든요. 게다가 하이베르트는 보르만이나 히틀러의 측근들만큼 이름값이 크지도 않았고요.”

“세상 어딘가엔 아직도 숨어 있는 자들이 있겠지.” 피트가 중얼거렸다.

책상 위 전화기가 울렸다. 국장이 수화기를 들었다. “예… 예, 좋은 소식이군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내려놓은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는 샌데커 제독을 향해 돌았다. “제일 먼저 축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제독님.”

샌데커가 시가를 한쪽으로 굴렸다. “대체 무슨 일로?”

국장은 여전히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제독의 어깨를 두드렸다. “당신의 해양 기묘물이 난산 끝에 새끼를 낳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제독님, 당신은 지금 ‘티저’ 새끼의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는 조금씩 가시고, 해가 기울며 늘어진 그림자가 거리를 덮어갈 무렵, 피트는 인도를 절뚝이며 걸어 나왔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도시를 바라보았다. 퇴근길 차량이 바쁘게 몰려 있었고, 곧 빌딩들은 텅 빈 채 고요해질 터였다.

멀리 국회의사당 돔이 저녁 햇살에 불타는 듯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피트의 머릿속엔 아득한 해변, 흰 배, 푸른 바다가 스쳤다. 마치 영겁의 옛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지오디노와 자킨서스가 계단을 내려와 그와 합류했다.

“신사 여러분.” 자킨서스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우리 셋은 미혼이고, 멋들어진 도시 남성들이니, 힘을 합쳐 유쾌한 한밤을 즐겨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지.” 지오디노가 나섰다.

피트는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유감스럽게도 사양해야겠군. 이미 선약이 있거든.”

“역시 같은 자리에 다시 돌아온 기분이야.” 지오디노가 투덜댔다.

자킨서스는 껄껄 웃었다. “큰 실수하는 겁니다. 내 수첩엔 워싱턴 미녀들의 번호가—”

그는 문득 말을 멈추고 거리를 응시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은색과 은빛이 조화를 이룬 거대한 자동차가 소리 없이 연도에 멈췄다. 위풍당당한 차체는 주변의 평범한 차량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위엄을 뽐냈다. 그리고 그 조수석에는 검은 머리칼의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세상에…” 자킨서스가 숨을 죽였다. “폰 틸의 마이바흐라니.” 그는 피트를 돌아봤다. “어떻게 손에 넣었소?”

“승자는 전리품을 차지하는 법이죠.” 피트가 교활하게 웃었다.

지오디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제 알겠네, 왜 기념품이 너무 커서 민항기에 못 실었다는지. 게다가 옆의 기념품도 만만치 않군.”

피트는 문을 열며 말했다. “내 아름다운 운전수는 이미 둘 다 아실 겁니다.”

“에게해에서 만난 아가씨를 떠올리게 하는군.” 지오디노가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쪽이 훨씬 아름답네.”

아가씨가 웃었다. “아첨엔 보답을 해야죠. 덕분에 미궁 속에서 거칠게 끌려다닌 건 용서할게요. 다만 다음엔 미리 알려주셔야 옷이라도 제대로 입죠.”

지오디노가 쑥스레 웃었다. “약속하오.”

피트는 자킨서스를 돌아봤다. 눈가엔 은근한 웃음이 스쳤다. “자크, 부탁 하나 해도 되겠소?”

“할 수만 있다면.”

“국 요원 한 명만, 딱 2주만 빌려주시오. 가능하겠습니까?”

자킨서스는 아가씨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죠. 당신 덕분에 국도 그 정도는 빚진 셈입니다.”

피트는 차에 올라탔다. 그는 지팡이를 지오디노에게 내밀었다. “이제 이건 필요 없을 것 같군.”

지오디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차는 부드럽게 움직여 교통 흐름 속으로 사라졌다.

지오디노는 고개를 돌려 그 큰 차체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킨서스를 보며 물었다.

“버섯 넣은 가리비 화이트와인 소스는 좀 해?”

자킨서스가 고개를 저었다. “냉동 TV 디너가 내 요리 인생의 전부요.”

“그럼 술이나 사시오.”

“난 가난한 공무원이라네.”

“그럼 나를 접대 비용 항목이라 생각해.”

자킨서스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려다 실패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까요?”

“그럽시다.”

그리하여 키 큰 자킨서스와 작은 지오디노는, 마치 만화 속 ‘머트와 제프’ 한 쌍처럼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며, 팔짱을 끼고 인근 술집을 향해 느긋하게 걸어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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