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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약물로 인한 잠은 허무 속으로 흩어지고, 소녀는 고통스러운 몸부림 끝에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흐릿한 빛이 천천히 열리는 눈을 맞이했고, 역겨운 악취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알몸이었으며, 맨등은 눅눅하게 젖은 누런 점액으로 덮인 벽에 붙어 있었다. 현실일 리 없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막 깨어나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이건 분명히 끔찍한 악몽일 것이다. 그러나 안에서부터 솟구치는 공포를 다잡기도 전에, 바닥을 뒤덮고 있던 누런 점액이 꿈틀거리며 살아오르더니 그녀의 무방비한 허벅지를 타고 기어올랐다.
이성이 마비될 만큼의 공포에 휘말린 그녀는 광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미친 듯이 발악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손목과 발목은 단단한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그마저도 끈적이는 점액에 파묻혀 있었다. 불경한 끈적덩어리는 느리고도 집요하게 그녀의 땀에 젖은 알몸 위를 기어올라, 마침내 가슴을 덮고…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
진동 섞인 굉음과 함께 정체 모를 목소리가 어둠 속 공간에 메아리쳤다.
“공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네, 소령. 하지만 임무가 기다리고 있어.”
소령 샘 네스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빌어먹을, 랩. 꼭 재밌어질 만하면 끼어드는군.” 그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옆자리 사내를 향해 말했다.
엔신 제임스 랩은 책 표지를 흘끗 보았다. 표지에는 누런 점액 속에서 몸부림치는 여인이 그려져 있었는데, 과장된 풍만한 가슴 덕분에 간신히 떠 있는 듯했다.
“어떻게 이런 쓰레기를 읽을 수 있습니까?”
“쓰레기라고?” 네스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문학 비평가까지 자처하나? 왜 하필이면 내 부조종사들은 하나같이 원시적인 머리통만 달고 태어나는지 모르겠어.”
그는 책을 옆 패널에 걸린 조잡한 코트걸이 책꽂이에 꽂았다. 그 안에는 이미 너덜너덜한 잡지들이 끼워져 있었는데, 온갖 선정적인 자세로 찍힌 여성 누드 사진들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네스의 ‘문학적 취향’이 결코 고전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네스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앞창 너머 바다를 바라보았다.
미국 해안경비대 초계기는 여덟 시간에 걸친 빙산 정찰 및 지도 작성 임무에 투입된 지 네 시간 이십 분째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고 시야는 수정처럼 투명했으며, 3월의 북대서양 한가운데라 믿기 힘들 만큼 바람조차 고요했다. 조종석에는 네스와 네 명의 승무원이 조종과 항법을 맡고 있었고, 나머지 여섯은 화물칸에서 레이더와 각종 장비를 주시하고 있었다.
네스는 시계를 확인한 뒤, 기수를 크게 틀어 뉴펀들랜드 해안을 향했다.
“자, 임무는 그만.” 그는 몸을 젖히며 다시 공포소설을 집어 들었다.
“랩, 세인트존스 도착할 때까지는 방해 금지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랩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 책이 그렇게 재밌으면, 다 읽고 나면 저도 좀 빌려주십시오.”
“안 돼.” 네스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 서재는 남에게 빌려주는 법이 없어.”
그 순간 헤드셋에서 잡음이 튀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스는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좋아, 해들리. 무슨 일인가?”
화물칸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일등병 버즈 해들리는 레이더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초록빛에 잠겨 있었다.
“이상한 신호가 잡힙니다, 소령님. 18마일, 방위각 347도.”
네스가 스위치를 눌렀다.
“이상하다니? 빙산인가, 아니면 네 레이더가 낡은 드라큘라 영화를 잡은 건가?”
“아마도 빙산 같긴 합니다. 하지만 반사 신호가 너무 강합니다.”
“좋아, 확인해보지.” 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랩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좋은 아이처럼 347도로 틀어.”
랩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종간을 돌렸다. 네 개의 프랫니 피스톤 엔진이 윙윙거리는 굉음을 내며, 거대한 초계기는 부드럽게 방향을 틀었다.
네스는 쌍안경을 들어 푸른 바다를 살폈다. 기체가 떨려 손이 흔들렸지만, 흰 점 하나가 점점 커졌다. 그것은 반짝이는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거대한 빙산이었다.
“슬론, 어떻게 보이나?”
빙산 관측을 맡은 중위 조니스 슬론은 화물칸의 반쯤 열린 문가에서 망원경으로 빙산을 보고 있었다.
“흔한 빙산입니다.” 로봇 같은 목소리가 헤드셋으로 흘러나왔다. “평평한 정상부를 가진 탁상형 빙산. 높이는 약 200피트, 무게는 아마 천만 톤쯤.”
“흔하다고? 고맙군, 슬론. 덕분에 언젠가 관광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스는 랩을 돌아보았다. “고도는?”
랩은 눈을 앞창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
“천 피트. 오늘 하루 종일, 어제도, 그제도 그대로였죠.”
“그냥 확인한 거다.” 네스는 점잔 빼듯 끊었다.
그는 낡은 비행 고글을 쓰고 창문을 열었다. 얼굴이 바늘로 찌르듯 얼어붙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빙산을 주시했다.
거대한 얼음 덩어리는 마치 유령 범선처럼 보였다. 랩은 속도를 줄이고 기체를 세 차례 선회시켰다. 마침내 네스가 머리를 들이밀며 마이크를 잡았다.
“해들리! 저 빙산은 갓난아기 엉덩이처럼 매끈하다.”
“아닙니다, 소령님. 제 레이더에는 뚜렷한 신호가 보입니다.”
“선장님, 서쪽 면 수면 가까이에 어두운 물체가 보입니다.” 슬론이 끼어들었다.
“랩, 백 피트로 내려.” 네스가 지시했다.
몇 분 만에 기체는 더 낮아졌다. 여전히 원을 그리며, 실속 직전의 속도로 빙산을 돌았다.
“더 가까이.” 네스는 낮게 중얼거렸다. “백 피트 더.”
“차라리 저 위에 착륙하지 그러십니까.” 랩은 건성으로 내뱉었다. 그의 표정은 잠에 빠지기 직전처럼 무덤덤했지만,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빙산 벽은 창밖 위로 솟구쳐 있었고, 작은 실수 하나면 파도에 날개가 걸려 대형 참사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네스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듯한 형체. 그것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인공적인 구조물, 사람의 손길이 닿은 무엇이었다.
마침내, 랩에게는 영겁처럼 느껴진 시간이 흐른 뒤, 네스가 고개를 기체 안으로 들이밀며 창문을 닫고 마이크를 눌렀다.
“슬론, 봤나?” 네스의 목소리는 베개에 막힌 듯 굳어 있었다.
처음에 랩은 그의 입술과 턱이 얼어붙은 탓이라 생각했지만, 재빨리 옆눈으로 보고는 놀랐다. 네스의 얼굴은 냉기에 굳은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경이로 얼어붙어 있었다.
“봤습니다.” 슬론의 목소리는 기계적 메아리처럼 울렸다. “하지만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분명 있어… 배야. 얼음에 갇힌 빌어먹을 유령선이.”
그는 고개를 저으며 랩을 돌아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세한 건 알아낼 수 없었어. 뱃머리인지, 선미인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어. 흐릿한 윤곽만 보였을 뿐이다.”
그는 고글을 벗어내고 오른손 엄지를 들어 올려 위쪽을 가리켰다. 랩은 안도하듯 숨을 내쉬며 초계기를 수평으로 세웠고, 기체의 동체 밑바닥과 차가운 대서양 사이에 한층 여유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실례합니다, 소령님.” 해들리의 목소리가 헤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레이더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정중앙에 가까운 곳에서 작은 흰 점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빙산 속에 묻혀 있는 그 물체의 전체 길이는 대략 125피트 정도 됩니다.”
“아마도 버려진 어선일 거야.” 네스는 두 뺨을 세게 문질렀다. 얼어붙었던 피가 돌기 시작하자 통증이 밀려와 얼굴을 찡그렸다.
“뉴욕의 관구 본부에 연락해 구조대를 요청할까요?” 랩은 담담하게 물었다.
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구조선을 급히 보낼 필요는 없어.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는 게 분명하잖아. 뉴펀들랜드에 착륙한 뒤에 상세 보고를 올리면 된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슬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빙산 위로 한 번 더 지나가 주십시오, 선장님. 제가 염료 표시를 떨어뜨려 두면 나중에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슬론. 내 신호에 맞춰 떨어뜨려.” 네스는 다시 랩을 보았다.
“빙산 꼭대기를 300피트 상공에서 넘어가도록 조종해.”
네 개의 엔진 출력을 낮춘 보잉 초계기는 거대한 새처럼 당당히 빙산 위를 훑고 지나갔다. 마치 태곳적 둥지를 찾아 헤매는 중생대의 괴조 같았다.
화물칸 문가에서 슬론은 팔을 들어올린 채 잠시 멈췄다.
네스의 구두 신호가 떨어지자, 슬론은 붉은 염료가 가득 든 피클 병을 허공으로 내던졌다. 병은 점점 작아지더니 마침내 매끈한 얼음 절벽에 부딪혀 깨졌다. 눈을 좇아보니, 눈덩이만 한 빙산 표면 위로 선명한 주홍빛 줄기가 서서히 번져 내려가고 있었다.
“딱 맞췄군.” 네스의 목소리는 거의 유쾌하게 들렸다. “수색대가 찾는 데 애먹을 일은 없겠다.” 그러나 곧 표정이 굳으며, 그는 다시 얼음 속에 묻힌 미지의 선박 쪽을 내려다보았다.
“불쌍한 사람들. 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 수 있을까?”
랩의 눈빛이 잠시 사색에 잠겼다.
“이보다 더 큰 묘비를 바랄 수도 없었겠죠.”
“잠시뿐일 거다. 저 빙산이 며칠 후 걸프 스트림에 닿기만 하면, 맥주 여섯 병조차 시원하게 식힐 수 없을 만큼 작은 덩어리로 흩어져 버릴 테니.”
기체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것은 비행기 엔진이 내는 단조로운 윙윙거림 덕에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앉아, 바다 위로 불길하게 솟구친 하얀 빙산과 그 아래에 감춰진 수수께끼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내 네스는 좌석에 거의 드러눕듯 몸을 기댔다.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태연한 얼굴을 되찾았다.
“강력히 제안하네, 엔신. 자네가 이 육중한 괴물 버스를 사십 도짜리 바닷속에 처박을 생각이 없다면, 연료 게이지가 목이 말라 죽기 전에 뉴펀들랜드로 데려가 주게. 아, 그리고 제발, 더는 방해하지 말게.” 그는 위협적인 미소를 지었다.
랩은 네스를 노려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기수를 다시 뉴펀들랜드 방향으로 돌렸다.
해안경비대 초계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네 개의 엔진이 내던 마지막 진동마저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 사라지자, 거대한 빙산은 다시 고요에 잠겼다. 그것은 거의 1년 전, 그린란드 서해안에서 빙하가 갈라져 바다로 떠밀려 나온 이래 줄곧 견뎌온 죽음 같은 침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빙산 수면 바로 위쪽에서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희미한 형체 두 개가 서서히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더니, 두 남자가 일어나 퇴각하는 초계기가 사라진 하늘을 주시했다. 스무 걸음만 떨어져도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눈처럼 흰 옷을 입고 있었고, 그 차림은 배경과 완벽히 섞여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며 귀를 기울였다. 초계기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자, 그중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얼음을 긁어냈다. 그러자 작은 무전 송수신기가 드러났다. 그는 길이 10피트짜리 안테나를 뽑아 올리고 주파수를 맞춘 다음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오래 돌릴 필요도, 세게 돌릴 필요도 없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같은 주파수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고, 곧바로 응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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