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식목일이 계속 공휴일로 남아 있다는 게 내게는 가끔 신기하게 느껴진다. 요즘은 식목일이라고 해서 나무를 심는 사람도 많은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식목일은 미 군정기인 1946년, 조선 성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직접 논을 경작한 날을 기원으로 하여 정했다고 한다. 이날은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삼국을 완전 통일한 날이기도 하다. 그동안 많은 공휴일이 명멸해갔는데, 식목일은 1949년 공휴일이 된 이후 1960년 한해를 빼고는 지금껏 공휴일로 남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농사를 중시해온 우리 조상들의 뜻을 기려서일까? 내 생각으론 그것보다는 성묘를 하는 한식과 겹친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어린 시절 식목일에는 대개 학교에 가서 나무를 심어야 ..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세상만사를 이분법으로 보는 어떤 내 친구는 나와 같은 세대를 “중고등학교에서 을 배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도시에서 자란 이들이야 이나 을 배웠지 을 배웠을 리 없다. 의대생이 농대로 옮겼다고 해서 신문에 나고, 농업고등학교라곤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과목을 배웠다는 것보다 더 딱 떨어지는 촌놈의 증거가 있을까 싶다. 물론 학교 공부란 게 삶의 현장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경우가 많다. 시클라멘, 피튜니어, 베고니아같은 서양의 식물 이름을 시험 때문에 열심히 외우기는 했으나, 내가 그 식물들의 생김새를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내가 다른 식물에 대해 아는 것도 대부분은 학교 공부 덕이..
광우병에 신경을 쓰며 먹는 스테이크는 맛도 없고 몸에도 좋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벌레 먹고 볼품없는 채소나 과일도 그것이 유기농산물이라면 상쾌한 기분에 맛까지 좋게 느껴질 것이다. 막 주말농장에서 솎아낸 상추를 씻어, 그 자리에서 구운 삼겹살을 한번 싸먹어보라. 주말농장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 맛’을 못 잊어 해마다 농장을 다시 찾는지도 모른다. 주말농장에서 재배한 채소는 얼마나 안전할까? 농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농장에서는 봄농사를 준비하기 전 관리인이 토양살충제를 한 차례 뿌린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작물이 자라는 동안 농장 관리인이 잘 자라라고 몰래 농약을 친다”고도 말하는데, 억측 같다. 화학비료를 밑거름으로 쓰지 않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농장 한쪽에 밭에서 뽑아낸 풀 따위를 ..
백치 아다다의 아버지 김 초시는 한 섬지기 논으로 노총각 사위를 샀다. 한섬은 스무말(斗)이니까, 한 섬지기는 스무 마지기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만한 논농사를 지으면 중농이었다. 지금은 그 정도 가지고는 연소득 600만원 올리기도 어렵다. 하지만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고추따기 같은 밭일을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한 마지기 땅이 얼마나 넓은지 잘 안다. 한 마지기는 ‘한말의 씨앗을 뿌릴 정도’의 넓이다. 산지냐 평지냐, 땅이 기름지냐 척박하냐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200평을 한 마지기로 친다. 주말농장은 한 구획이 대개 5평, 넓은 곳이 10평이다. 1평은 사방 여섯자, 3.3㎡다. 구획간의 경계를 빼면 5평은 1.5×10m짜리 큰 이랑이다. 좁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 넓이면 푸성귀 농사..
온가족이 땅을 가꾸며 생계를 잇던 유년 시절… 경기도 일산 시골마을에 ‘가족농장’ 마련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한 후배는 어느 노시인의 자서전을 읽다보니 자꾸 내 얼굴이 떠오르더라고 했다. “형에게 듣던 어린 시절 얘기와 어쩌면 그리 비슷하냐…”고. 그 시인은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기신 분이다. 그런데 아직 마흔도 채 되지 않은 시퍼런 나이의 내가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 문명이 밀려들기에는 도시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이었던 까닭이다. 그랬다. 나는 호롱불 밑에서 한글을 배웠고, 아버지의 소달구지를 타고 삼십리 떨어진 장에 따라가 기차를 구경하곤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직접 짚으로 짜신 멍석을 마당에 펴고, 백제시대에 쓰던 것과 거의 똑같이 생긴 훑테로..
의복이 인간에게 제2의 피부라면 집은 제3의 피부 여름밤 학교 연구실에서 느지막이 일이라도 하면 풍뎅이나 날벌레들이 방충망 사이로 어느 틈엔가 들어와 윙윙거린다. 불빛을 보고 들어온 벌레들은 다음날 여지없이 연구실 구석 어딘가에 널브러져 죽어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산속에 자리 잡아 공기 좋은 연구실이건만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건물내부는 벌레들에겐 그렇지가 못한 듯 하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집은 그런대로 벌레들도 살만한 집인가 보다. 가끔씩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풍뎅이며 거미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흙과 나무로 마감한 우리집에선 벌레들을 죽이지만 않으면 스스로 살아 돌아나간다. 물론 아내는 징그럽다고 하지만 아이들에겐 신기한 자연관찰감이기도 하다. 오늘날 현대화된 도시에서 사람들은 생애의 80~90% 가..
최근 한방이 양방에 판정패한 분야가 있다. 바로 정력제 시장이다. 비아그라, 시알리스, 레비트라 등의 발기부전 치료제가 나오면서 한방의 강점이던 보약의 수요가 감소했다. 정력 때문에 한의원을 찾는 보약 환자의 수는 크게 줄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접하면서 걱정을 하는 한의사들이 많다. 수입이 주는 것도 우려되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발기부전 치료제에 의존하여 성생활을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를 걱정한다. 한방에서 성생활 때문에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보는 경우는 음허 환자들이다. 잘 어지럽고 손발이 화끈거리며 몸에 열이 오르다 땀이 나며 열이 사라지는 것이 대표적인 음허증이다. 잘 때 땀이 나거나 건망증이 심해지기도 한다. 음허증 환자들이 과도한 성생활을 하면 음허 증상이 더욱 심해진다...
어혈은 혈관 벗어나 조직에 고여있는 혈액 “어혈 때문에 생리통이 나타나는 겁니다” “어혈로 인한 두통입니다” 한의원에 가면 ‘어혈’이란 말을 자주 듣지만 어혈이 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충 나쁜 피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만다. 과연 어혈이 뭐길래 생리통도 만들고, 두통도 생기게 할까. 게다가 한의사들은 어혈로 인해 현기증, 이명, 수족냉증, 가슴두근거림도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다양한 증상을 일으키는 어혈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여러 원인에 의해 혈관을 벗어나 조직에 고여 있는 혈액을 어혈이라고 볼 수 있다. 어혈의 범위를 좀 더 확대한다면 혈관내의 혈액이나 기름 덩어리도 어혈로 볼 수 있고, 혈관이 충혈 또는 울혈된 것도 어혈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한의사들은 ..
“저는 사실, 변증법적 유물론자입니다.” 최근 만난 어떤 분과 대화를 하다가 듣게 된 말이다. 아, 변증법이라니, 유물론이라니, 얼마 만에 들어보는 단어인가. 이미 십수년 전에 완전히 멸종됐다고 학계에 보고된 희귀동물을 도시 한복판 술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듯한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이 붕괴되고,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부서지는 역사를 목도하며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갔다”라는 말을 하고,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깨동무를 풀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었다. 깃발은 내려지고, 동상은 철거되고, 군중은 해산했다. 그즈음 13대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씨는 “이제는 안정입니다”라는 슬로건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이념과 혁명의 시대가 아니라, 먹고살기에 급급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이끌었다. 그..
흔히 말하는 진화란 좀더 단순한 것에서 좀더 복잡한 것으로 분화되는 것이며, 이로써 좀더 나은 것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이 상식화된 진화론이 다윈보다는 스펜서나 헤켈의 이론이라는 건 이젠 널리 알려져 있다. 다윈의 이론에서 진화란 발전이나 진보가 아니며, 정해진 방향성이 없다. 거기서 진화란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말한다. 살아남는 능력이란 점에서 박테리아를 당할 생물은 없으며, 따라서 박테리아가 가장 진화된 생물이라고. 다윈의 진화 개념이 갖는 이런 양상은 19세기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선 매우 현대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아직도 진화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면모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진화의 관념에는 생존경쟁과 적자생존, 자연도태라는, 경쟁과 적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