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2“폴리키투스 아낙사만데르 제노.” 가이드는 스스로를 소개했다. “당신을 모시는 길잡이요.”“제노, 하나만 묻지.” 피트는 그의 풀네임을 따라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빠져나올 때, 어떻게 거기 숨어 있었던 거지?”“난 원래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오.” 제노가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당신과 친구가 내 관광단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걸 보고 생각했지. 저 두 놈은 대체 폐허 속에서 뭘 발견했길래 저리도 열심히 쫓는 걸까? 답이 안 나왔어. 그래서 동료 가이드에게 무리를 맡기고 원형극장으로 돌아왔지. 그때 당신들은 없었어. 그런데 문에 부러진 쇠살이 있더군. 대단한 추리는 아니오. 난 그곳의 돌 하나, 금 하나도 모르는 게 없으니까. 당신들이 나올 거라 확신했고, 그래서 기다렸을 뿐이오.”“..
11 - 1피트는 얼어붙은 채 충격을 삼켰다. 한쪽 다리는 바깥에, 다른 쪽은 어색하게 통로 안에 꺾인 채, 그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손전등과 가방을 뒤로, 계단 아래로 던져버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눈부신 햇빛에 시야가 서서히 적응하자, 낮은 돌담에서 몸을 떼어내 앞으로 다가오는 흐릿한 형체가 윤곽을 드러냈다.“…잘 이해가 안 됩니다.” 피트가 바보 같은 촌뜨기 투로 중얼거렸다. “우린 도둑이 아니오.”그때 다시 커다란 폭소가 터졌다. 흐릿하던 형체는 그리스 관광청 가이드로 변해 있었다. 하얀 이를 드러낸 미소가 커다란 콧수염 아래 번쩍였고, 햇볕에 그을린 손엔 9밀리 클리센티 자동권총이 들려 있었다. 총구는 피트의 심장 한가운데를 겨누고 있었다.“도둑이 아니라고요?” 가이드는 ..
10 - 2강력한 손전등 불빛이 계단에 흩뿌려진 진득히 말라붙은 혈흔을 비추었다. 가파르고 고르지 못한 석계단 위로 이어진 핏자국은 몇 군데 덩어리로 뭉쳐 있었고, 간혹 작은 방울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피트는 몸을 떨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것은 자신의 오래된 피 때문이 아니라, 바깥의 오후 열기에서 한순간에 눅눅하고 서늘한 미로의 냉기로 바뀐 탓이었다. 계단 끝에서 그는 반쯤 달리기 시작했다. 손전등 불빛은 흔들리며 균열진 천장에서 거칠게 파낸 암반 바닥까지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전날 밤 그를 옥죄던 고독과 공포는 이제 없었다. 옆에는 알 지오디노, 작지만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덩어리, 수년간 믿어온 친구가 함께 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무엇도 나를 막지 못한다. 피트는 이를 악물었다.어두운 통로가..
10 - 1타소스인들은 연극을 무엇보다 사랑했다. 그것을 교육의 필수라 여겼으며, 심지어 거리의 거지까지 모두 극장으로 불려나왔다. 새로운 본토의 연극이 초연되는 날이면 도시의 가게는 모조리 문을 닫았고, 장사는 모두 멈췄으며, 죄수들까지 풀려났다. 다른 대부분의 공공 행사에서 배제되던 창녀들조차, 그날만큼은 극장 입구 덤불 속에서 아무런 법적 제재 없이 ‘영업’을 허락받았다.그리스 관광청 가이드는 설명을 잠시 멈추고, 경악한 여인들의 표정을 보고는 흡족한 듯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언제나 똑같았다. 여인들은 부끄러운 척하며 속삭였고, 버뮤다 반바지 차림에 카메라와 노출계로 도배한 남자들은 껄껄 웃으며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고 의미심장한 윙크를 주고받았다.가이드는 멋지게 기른 콧수염을 꼬아 올리며 무리를 살..
9 - 3더크 피트는 알 지오디노를 바라보았다.“그걸 깜빡했군. 샌데커 제독께서 네 메시지에 답을 하셨나?”지오디노는 빈 병을 툭 던져 휴지통에 떨어뜨렸다.“오늘 아침에 도착했지. 내가 소령과 함께 브래디 비행장에서 퍼스트 어템프트로 출발하기 직전이었어.”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천장을 기어가는 파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트림을 했다.“그래서?” 피트가 다급하게 다그쳤다.“제독은 열 명으로 팀을 꾸려 국가 기록 보관소를 뒤졌어. 결과는 하나였지. 타소스 해안 근처 난파선에 보물이 실려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거야.”“화물은? 기록된 난파선들 중에 귀중한 걸 실은 배는 없나?”“별 볼 일 없어.” 지오디노는 가슴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제독의 비서가 무선으로 불러준 명단이야. 지난 200년간 타소..
9-2피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지오르디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루이스를 향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이상하군요.”“왜 그렇지?” 루이스가 시가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타소스는 수에즈 운하 본 항로에서 최소한 북쪽으로 500마일은 떨어져 있습니다.” 피트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폰 틸이 왜 자신의 배들을 일부러 1,000마일이나 우회시키는 걸까요?”“몰라.” 지오르디노가 성가신 듯 대꾸했다. “솔직히 말해, 전혀 관심도 없어. 이제 그 말장난 좀 그만하고, 네 야간 모험담이나 털어놓으라고. 그 폰 틸이란 작자가 대체 지난밤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피트는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근육통이 뻐근하게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 안은 모래와 자갈을 씹은 듯 텁텁했고, 목은 말라붙어..
9-1피트는 선실 세면대 위 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수척하고 흉측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까만 머리칼이 얼굴과 귀로 늘어져 덥수룩하게 늘어진 왕관처럼 얹혀 있었고, 깊은 초록빛 눈은 붉게 터진 핏줄로 둘러싸여 있었다. 잠든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고작 네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를 깨운 건 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 밀려온 열기였다. 불덩이 같은 아침 공기가 살갗을 파고들며 그를 불쾌하게 뒤흔들었다. 닫혀 있던 통풍구를 열었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뜨거운 공기가 선실을 선점해 버렸고, 에어컨이 제 구실을 하기 시작하려면 이른 저녁은 되어야 했다. 피트는 수도꼭지를 틀고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물이 등과 어깨를 타고 흐르며 모공으로 스며들자 그제야 조금 시원해졌다.그는 대충 몸을 닦고..
8 - 2처음 노란 비행기를 발견한 사람은 거대한 A프레임 크레인 위에 앉아 있던 망보기였다. 그제야 피트와 건도 봤다. 불과 두 마일 거리, 해수면 800피트 상공을 날고 있었다. 더 일찍 봤어야 했지만, 태양을 정면으로 등지고 퍼스트 어템프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탓이었다.“10분 늦었군.” 피트가 중얼거리며, 가슴에 붕대를 감고 있던 하얀 염소수염의 의사에게 팔을 들어 보였다.노의사는 다가오는 비행기 따윈 돌아보지도 않고, 손놀림 빠르고 능숙하게 상처를 닦고 붕대를 묶었다. 마지막 매듭을 세게 조이자 피트가 얼굴을 찡그렸다.“지금은 여기까지입니다, 소령님. 갑판을 돌아다니며 블라이 대위처럼 고함만 안 치신다면 더 해드릴 수 있겠지만요.”“미안하오, 닥터. 진료실에서 차분히 진료받을 시간이 없었어...
8 - 1가파른 비탈을 4분의 1마일쯤 내려가자 길은 도로로 변했다. 도로라기보다는 잡초 속에 난 두 줄의 타이어 자국에 불과했다. 그 바퀴 자국은 지그재그로 산을 내려가며 수많은 헤어핀 곡선을 만들었다. 피트는 반쯤 달리듯 비틀거리며 내려갔다. 심장은 고통스러운 압박 속에서 미친 듯이 뛰었다. 부상은 심각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많은 피를 잃었다. 그를 본 의사가 있었다면 당장 병원 침대에 눕혔을 것이다.미로에서 탈출한 이래 피트의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한 장면이 되살아났다. 알바트로스에게 무방비로 기총 소사를 당하는 퍼스트 어템프트의 과학자들과 선원들의 모습이었다. 총탄이 살과 뼈를 갈기갈기 찢고, 하얀 선체에 붉은 얼룩이 번지는 장면이 눈앞에 선명했다. 브래디 비행장에서 신형 요격기들이 출격하기도 ..
7격렬한 분노가 피트를 덮쳤다. 그는 주먹으로 문을 내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두꺼운 판자를 보는 순간 생각을 바꿨다. 다시 복도로 몸을 돌려보니 여전히 비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몸이 떨렸다. 피트는 착각하지 않았다. 폰 틸이 자신을 이 빌라에서 살아 나가게 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은 이제 확실했다. 그는 양말에 숨겨 둔 칼을 떠올리며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녹슨 금속 촛대 위에서 깜박이던 노란 불빛이 칼날에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그러나 그 뾰족한 작은 과도는 자기 방어용으로는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단 하나의 위안은 그것이었다. 하찮아도 없는 것보단 낫다는 것.갑자기 무거운 한기 같은 바람이 복도를 휩쓸며 모든 촛불을 꺼뜨렸다. 피트는 질식할 듯한 암흑 속에 서 있게 되었다.그는 필사적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