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3“자, 소령.” 폰 틸이 말했다. “우리의 작은 만찬은 즐거우셨기를.”“네, 감사합니다.” 피트가 대답했다. “훌륭했어요.”폰 틸은 테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고,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나와 소령이 잠시 단둘이 있고 싶구나. 얘야, 서재에서 기다리거라. 곧 가마.”테리는 놀란 듯 굳었다. 그녀는 테이블 모서리를 움켜쥔 채 몸을 떨며 대답했다.“제발, 브루노 삼촌, 너무 이르잖아요. 디르크와의 대화는 나중에 하셔도 되잖아요?”폰 틸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삼촌이 말한 대로 하거라. 피트 소령과 논의할 중요한 일이 있다. 그는 널 그냥 떠나지 않을 걸로 확신한다.”피트는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갑작스러운 집안 소동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
6 - 2단 하루 뒤, 쿠르트는 연합군 전선을 넘어가, 바닷바람에 느릿하게 흔들리는 기구를 보았다.그는 분명, 왜 지상에서 대공사격이 없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관측석의 관측자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잠든 듯 보였고, 쿠르트의 기관총이 수소 가득한 풍선을 불덩이로 바꾸려는 순간에도 뛰어내려 낙하산을 펴려는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그게 함정이라는 걸 몰랐단 말입니까?” 피트가 물었다.“몰랐네.” 폰 틸이 대답했다. “풍선은 거기에 있었고, 그것은 곧 적을 의미했지. 쿠르트는 거의 반사적으로 급강하해 공격했네. 그는 기구에 다가가 스판단 기관총을 난사했지. 그 순간 풍선은 폭약이 터지며 불길과 연기에 휩싸였어. 영국군이 기폭선을 작동시킨 거였지.”“하이베르트는 연합군 전선에 추락한 겁니까?” 피트가 사색하..
6 - 1피트는 약간 넋이 나간 듯, 거대한 저먼 셰퍼드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개의 주인인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웃음기 없는 사악한 표정은 마치 늦은 밤 TV에서 보던 구식 영화 속 악역처럼, 전형적인 둥근 독일인 얼굴에 박혀 있었다. 삭발한 두피, 흔들리는 눈빛, 목 없는 체구. 꽉 다문 얇은 입술은 변비 환자처럼 보였다. 몸매 역시 악역의 전형을 닮아, 단단히 다져진 육체에 군살 하나 없었다. 채찍과 광택 나는 장화만 있으면 완벽했다. 순간 피트는 ‘사람들이 미워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나이,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이 되살아나서 의 한 장면을 연출하려 서 있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좋은 저녁일세.” 노인은 의심스러운, 목구멍 깊은 발음으로 말했다. “자네가 내 조카딸이 저녁 식사에 초대한..
5용광로 같은 공기는 서쪽 타소스 산 너머로 해가 기울면서 조금은 누그러졌다. 산자락에 늘어선 나무들이 드리운 기다란 그림자가 점점 내려와 브래디 비행장의 해안 가장자리를 덮을 즈음, 피트는 정문을 통과했다. 그는 바깥 도로에서 걸음을 멈추고 순수한 지중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폐 속이 짜릿하게 저려오는 감각을 즐기며. 담배를 찾는 습관적인 충동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는 억누르고 다시 숨을 들이마시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굽이치는 파도 너머, 저무는 태양은 ‘퍼스트 어템프트’를 황금빛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시야는 유리처럼 맑아, 이 마일 밖의 배 위 세세한 부분까지도 눈에 들어왔다. 피트는 꼼짝 않고 거의 두 분 동안 그 광경에 매료된 채 서 있었다. 그러다 약속한 차를 찾으려 두리번거렸다.차는 ..
4 - 2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트를 마주 보았다.“배에 타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계책을 짜내길 바라네.”“대령, 어떤 계획도 실제로 적용되기 전엔 절대 완벽하다고 할 수 없는 법이죠.” 피트가 대답했다.조르디노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제가 작전본부에 가서 제독에게 보낼 메시지를 전송하겠습니다.”“끝나고 나면 내 숙소로 와서 저녁을 같이 하지.” 루이스가 말했다. 그는 콧수염을 비틀며 피트를 향했다.“당신도 초대하네. 내가 자랑하는 특선 요리를 대접하지. 흰 와인 소스에 버섯을 곁들인 가리비 요리라네.”“매우 맛있게 들립니다.” 피트가 말했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거절해야겠군요. 이미 저녁 약속이 있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여성과 말입니다.”조르디노와 루이스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
4 - 1오후 다섯 시를 조금 넘겨 피트는 브래디 비행장 숙소로 돌아왔다. 끈적거리는 옷을 벗어던지자마자, 좁은 샤워실 바닥에 등을 대고 드러누웠다. 그의 머리는 한쪽 구석에 비스듬히 끼워졌고, 등은 타일 바닥에 바짝 붙은 채, 다리와 발은 반대편 구석으로 직각을 이루며 솟아 있었다.누가 들여다본다면 기괴하고 뼈를 비트는 듯한 자세로 보였겠지만, 피트에게는 더없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휴식이었다.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샤워실에서 긴장을 풀었다. 가끔은 졸기도 했지만, 대개는 빗방울 같은 물줄기와 고독 속에서 사색에 잠기곤 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그는 알려진 사실과 알 수 없는 요소들을 이리저리 굴리며 패턴을 찾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3 - 3소년은 곧 두 조각으로 잘린 케이블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땋아 만든 강철 케이블을 건에게 건네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피트는 스카치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들이키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잔을 건의 책상 위에 내려놓고 케이블을 손에 들어 양 끝을 주의 깊게 살폈다.겉보기엔 흔한 기름때 묻은 강철 케이블 같았다. 각각 길이는 약 60센티미터였고, 2,400가닥의 철선이 꼬여 5/8인치 굵기를 이루고 있었다. 끊어진 부분은 한 지점에서 똑 부러진 것이 아니라 약 15인치 구간에 걸쳐 흩어져 있어, 너덜너덜 풀려버린 말꼬리처럼 보였다.뭔가가 피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는 확대경을 들어 무거운 렌즈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눈빛이 번뜩였고, 입가에는 자만 섞인 미소가 번져갔다. 오래 잊고 있던 흥분과 음..
3 - 2건의 눈빛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다음에 고려해야 할 점은 티저가 따뜻하고 얕은 바다에서 살았다는 거야. 기록된 목격담은 모두 해안에서 세 마일 이상 벗어나지 않았고, 모두 바로 이 동지중해에서 일어났지. 이곳의 수온은 섭씨 17도 밑으로는 거의 내려가지 않거든.”“그게 뭘 증명한다는 거지?” 피트가 물었다.“확실한 증거는 아니지만, 원시 포유류는 온화한 기후에서 더 잘 살아남지. 그러니 티저가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가능성을 조금은 뒷받침해 주는 셈이야.”피트는 건을 잠시 생각스럽게 바라보다가 말했다.“미안하지만, 루디. 아직도 난 납득이 안 가.”“네가 고집불통일 줄 알았다.” 건이 말했다.“그래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마지막까지 아껴둔 거야.”그는 안경을 벗어 클리넥스로 렌즈를 닦더니, 매부..
3 - 1젊은 금발의 승무원이 밧줄을 풀자, 26피트 길이의 양끝이 뾰족한 고래잡이 배는 브래디 비행장 근처 임시 부두에서 천천히 밀려나 파란 물결 위로 ‘퍼스트 어템프트(First Attempt)’를 향해 나아갔다. 네 기통 부다(Buda) 디젤 엔진은 분당 여덟 노트의 속도로 튼튼한 배를 밀어냈고, 익숙한 디젤 연료 냄새가 갑판 위로 퍼져갔다. 아침 아홉 시가 채 되지 않았지만, 태양은 이미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약간의 바람조차 더위를 식혀주지 못했다.피트는 서서 해안이 점점 멀어지는 걸 바라보다가, 부두가 파도선 위에 더러운 점처럼 보이게 되자 190파운드의 몸을 배 선미를 두른 튜브 모양 난간 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물보라를 일으키는 배의 꼬리물결 위에 걸터앉았다...
2 - 4“그래요, 지난달 런던에서 새 차로 사서 르아브르에서부터 직접 몰고 왔어요.”“삼촌 댁에 얼마나 계실 건가요?”“세 달 휴가를 냈으니 앞으로 최소한 여섯 주는 더 있을 거예요. 그다음엔 배를 타고 돌아갈 거예요. 대륙을 횡단한 드라이브는 재미있었지만 너무 피곤했거든요.”피트가 차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운전석에 미끄러지듯 앉았다. 그녀는 잠시 앞좌석 밑을 더듬더니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그중 하나를 시동구멍에 꽂고 돌리자 엔진이 켜지며 배기구가 한 번 기침하듯 뱉더니 날카로운 으르렁거림을 토해냈다.피트는 먼지 낀 차문에 팔을 괴고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당신 삼촌이 산탄총 들고 날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죠?”“걱정 마세요, 아마 말로만 당신 팔이 빠지게 하실 거예요. 삼촌은 공군 출신들을..